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追憶┃詩人이 보는 世上┃2024-08-23

2024年 日常

by 詩人全政文 2024. 8. 23.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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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이란 어느 분위기 좋은 찻집 벽에걸려있는 마른꽃과 같은것이다.

생화처럼 싱그러운 향기는 없지만 오래 오래 마음속에 액자처럼 걸려 있는 것,

그래서 본래의 빛깔이나 향기는 사라졌다 해도 우리들의 마음안에 늘 은은하고 곱게 자리하고 있는

소중한 기억이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추억이 있다.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일들은

시간이 흘러가고 나면 하나의 추억이 된다.

잊지 않으려 애쓰는 추억과 잊어버리려 애쓰는  추억이 간단히 구분되지도 않지만

오히려 잊으려 애를 쓰면 쓸수록 가슴에 각인되는 깊이는 거꾸로 더 깊어진다.

잊지 않으려 애쓰는 의지는 기억의 창고에 수납되기가 쉽고 무의지한 감성적 느낌이라야

추억의 골방에 남겨진다. 추억이란 말이 붙으면 그건 이미 절반은 자신의 의지를 벗어난

자신의 옛일일 따름이다. 추억은 바다와도 같은 것 날씨에 따라서 잔잔히 흐르는 것도 있고

격랑을 이루며 구비치는 것도 있다. 좋은 날씨의 추억은 햇살을 닮아 맑고 투명하지만

흐린 날씨의 추억은 역시 회색이며 무겁다. 가장 괴롭고 어려운 추억은 거친 격랑에 휩쓸리듯

사나운 추억이 아니다. 끝도 모르는 바다 안개 속을 헤매는 것처럼 방향을, 갈피를 잡지 못하는

오리무중인 것이다. 커피 한 잔 앞에 놓고 떠올리는 추억은 맑고 투명하지만,

맑은 술 한 잔 앞에 놓고 떠올리는 추억은 매번 진회색 투성이다.

오래된 어릴 적 추억은 돌아보며 슬며시 미소를 보이지만, 근래 만들어진 추억은

눈물 한 방울 ‘찍’ 묻어나는 게 많다. 아직 설익은 탓이리라. 날 살찌게 하는 추억도 있고

마르게 하는 추억도 있다. 이미 청춘을 한참 넘어선 나이지만

추억의 깊이를 헤아릴 정도는 된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드실 때에 떡과 잔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이것들을 나누어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이 잔은 내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눅22:19~20)

그 후 제자들은 박해의 위기와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주님의 떡과 잔을 나누며

주님을 기념했다. 그 때 그들은 주님과 함께 지낸 행복하고 즐거웠던 순간들을 기억하면서

위로를 얻고 용기를 내었던 것이다. 그래서 성만찬은 주님을 추억하는 행위이다.

초대교회는 모일 때마다 성찬식을 거행하며 주님을 추억했고 다시 오실 주님을 대망했다.

추억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과일처럼 익는다. 익고 또 익다가 삭는다.

사람이 한평생 살아가는 동안 꽤 많은 인연들과 만나게 된다.

만남은 만남으로 완성되는 게 아니다. 아프게도 매번 이별을 통해 완성되기 마련이고,

이제가 마지막이길 늘 소원한다. 특별한 인연과의 이별이라 해서 기억이 모두

추억의 방으로 옮겨지는 것도 아니다. 부모 자식 등 필연적 인연 간에 이별은

고통의 정도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라선지 인연이 언제까지나 기억의 창고에 남아있는 채

추억 방으로 넘어가질 못한다. 기억의 장에 남아있는 한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숙성되거나

익어가지 못한다. 머릿속 기억은 색이 바라면 바랐지 숙성되는 경우란 없다.

망각이랄 순 있어도 기억이 승화된단 표현도 우린 하지 않는다.

숙성되고 승화되고 종내 곰삭는 건 오직 가슴속 추억일 뿐이다.

사람이 누구와 사랑을 나누는 기간엔 과거를 생각하지 않는다.

오로지 현실적 달콤함에 젖어들고 내일로 미래로 줄곧 지향할 뿐이다.

사랑이란 감정은 처음엔 가슴에서부터 시작된다.

머리로 시발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사랑이 사랑으로 끝나면 계속 가슴에 남아 숙성되지만 사랑이 깨어지거나 배반을 당하게 되면

의지는 거꾸로 머리로 향한다. 질투심, 분노 등은 모두가 머리에서 이뤄지는 자의식이다.

그래서 사랑을 모르고 또 모를 일이라 하는가 보다. 커피 한잔을 앞에 놓고 젖어드는 추억은

커피색처럼 진하다. 색만 진하지 한숨 한 스푼에 온기는 어느새 차갑게 식어버린다.

무심한 사람들이 미처 의식하지 않아서 그렇지 단맛은 식은 커피가 더 달다.

시간도 우려 넣고 한숨도 우려 넣고 빈 눈길로 오래 휘저었으니 마냥 우러난 커피가

더 단 건 당연하다.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땅에 스며들지 못하고 겉만 적시며

살아 온 것 같다. 누굴 진하게 감동시켜 본 적이 없었고, 댓가를 바라고 한 것은 아니지만

머릴 굴리며 살았던 사람들은 다 잘사는 데, 이게 뭔가하는 생각이 들 때면

세상을 헛살았다는 기분이 들 때가 종종있다. 여태까지 잘 해왔으면서

왜 지금에 와서 방정맞은 생각이 드는지 알 수가 없다.

 

-全政文 詩人의 ((흘러가는 시간앞에서)) 중에서-

photo back ground-궁남지 소경

충남 부여군 부여읍 궁남로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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