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는 하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Rome was not built in a day)는 말도 있거니와
서두른다고 선착(先着)하는게 아니건만 42,195km를 단거리 선수처럼 전력 질주하는
현대인의 모습이 애처롭다. 때로는 커피한잔의 여유속에 젖어 보고 마쉬멜로우의 달콤함에 취해
보기도하며 샤넬 No5의 향수로 기분을 전환시켜 보는 것도 좋은듯한데 도무지 여유(餘裕)가 없이
달리기만 한다. 결국은 니힐리즘(nihilism)에 빠져들어 허무한 감상에 사로잡히는 순간까지
무엇인가에 쫓기듯 살아가고 있다. 아인슈타인(Einstein,Albert)은 바이얼린을 연주하며
일상의 권태로움을 해소했다고 하던가? 나는 요즘 권태로움을 자주 느낀다. 권태로움은
거미줄 같아서 고운 명주실처럼 느껴지나 멀지않아 온 몸을 휘감아 운신(運身)하지 못하게
하는 무서운 마음의 병이며, 권태(weariness)는 일직선일 때 생긴다.
그래서인지 나는 요즘 일직선으로 뻗은 고속도로보다는 구불구불한 호젓한 길을 선호한다.
반듯하고 곧은 길 대신에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나아가는 길을 달리면서 잠시 일상에서 벗어나
마음의 여유를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려이다. 현대인들이 권태(weariness)에 빠지는 이유는
여유(餘裕)가 없어졌다는 것과 유머(humor)의 상실이라는 생각을 가져본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의 폭격으로 영국 버킹엄(Buckingham)궁의 벽이 무너졌다.
그러자 영국 왕실은 이렇게 말했다."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독일의 폭격으로 그동안 왕실과
국민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벽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이제 여러분의 얼굴을 더 잘 볼 수 있게 돼
다행입니다." 극도의 불안감과 의기소침(意氣銷沈)했던 영국인들에게 희망을 주었던 것은
그 상황속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았던 지도자들의 침착성(沈着性)을 풍자하는 유머이다.
나는 왜 이럴까라는 생각이 들적마다 나에게 찾아오는 것은 조급함을 경계한다.
이미 늦어버렸는데 무엇이 조급하단 말인가? 석양속에 걸어가는 내 뒤로 길게 드리워진채
나를 쫓고 있는 그림자처럼 조급함이라는 괴물은 오늘도 나를 쫓고 있다.
그래도 문경지교(刎頸之交)하는 벗이있고, 폭격맞아 벽이 무너지지도 않았는데
아직은 호들갑을 떨고 싶지는 않다. 李창림(昌林)이란 스님의 법명은 춘성(春城)인데,
1891년 강원도 인제군원통리에서 태어나 백담사로 출가하여 만해 휘하로 들어가 승려가 된 분인데,
그는 생전에 얼마나 욕을 잘 했든지 그 앞에서는 단 10분을 견디기 어려웠다는 일화를 남겼다.
그러나 그의 거침없는 언변에는 해학이 있고,번뜩이는 재치가 있었기에 당장은 아프지만
뒤돌아 되새겨보면 여운이 남는 그런 욕쟁이로이름을 떨쳤다.
욕(辱)은 대게가 남을 저주하거나 미워하는 말, 또는 자신의 어리석음을스스로 나무랄 때
사용되는데,욕이 발생하게 되는 사회적 배경과 유래 또한그 수없이 많은 욕에 따라
각각 다소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순화된 말로 의사가 전달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 할 경우에사용되어지는 욕(辱)이라도 인격적인, 그리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자기성찰에 기반을 둔 표현이라면 좋을 것이다. 요한이 독사의 자식이란 독설을 퍼붓었지만
그의 욕(辱)은 강단에서 설교로 미화되고 교훈이 되고 있다. 춘성(春城)스님이 육두문자를
거침없이 써서 욕(辱)쟁이 스님으로도통했으나 그는 평생 옷 한벌 바리때 하나만으로 살다간
무소유의 실천가였기에 욕먹기를 자처하는 사람이 많았다. 할 것 다하고,가질 것 가 챙기면서
남을 정죄하는 차원에서욕(辱)을 하는 것은 되게 기분만 상한다. 욕(辱)을 멋들어지게 하자.
그리고 욕먹지 않도록 수신제가를 삶의 모토로 정해 놓았다.
나는 어려서 부터 '헛똑똑'이란 소릴 자주 들었다. 똑똑하다는 말 앞에 '헛'이란 접두사
한자만 붙이면 전체의 의미가 바뀌어 버린다. '헛' 자(字)가 붙으면, 일부 명사 앞에 붙어,
‘쓸데없는’ 또는 ‘보람이나 실속이 없는’의 뜻을 더하는 말이 되고만다.
지금도 여전히 '헛똑똑'이다. 여전히 손해보는 장사를 한다. 실속을 차리려면 얼굴이 먼저
붉어져 뒤늦은 후회를 하면서도 여전히 헛똑똑한 면을 들어낸다.
'헛것 헛걸음 헛기침 헛소리 헛소문 헛웃음 헛돌다 헛되다 헛듣다 헛디디다.'
등이 바로 그것이다. 아무리 좋은 의미라 하더라도 앞에 '헛'자가 붙으면 모든게 부정되고 말지만,
그래서 영특(?)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도 해보지만 체질적으로 잘 안된다.
나는 요즘들어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를 하는지는 모르지만 명분과 실리 중에
나는 어느쪽에 치중하며 살았는지를 반추해 본다. 딱히 규정짓기가 쉽지만은 않다.
명분을 내세우면서도 실리쪽을 기읏거렸고, 실리를 취하면서도 명분이 있는가를 고민했다.
그러나 명분과 실리의 대결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모든 명분은 사실상
그 내부에 실리의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 이는 곧 명분이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가치이기에
그 주장하거나 고수하는 측면에서는 하나의 실리라는 것이다. 또한 실리라는 것도
명분이 없다면 어느 사회에서든지 설 자리가 없어지기 때문에 실리를 주장하는 입장도
그 실리 자체가 명분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결국 명분과 실리는 서로 다른 가치가 아니라
보완적이며 동일한 가치의 다른 관점에서 보고 있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존재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도 여전히 삼복 더위가 지속되었다.
오히려 비가 내리던 날들이 좋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후덥지근하고 짜증을 유발시킬
정도로 일하기엔 쥐약같은 날씨였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시간임에도
올들어 처음으로 열대야 현상이 일어난 것 처럼 덥다.
-全政文 詩人의 ((흘러가는 시간앞에서)) 중에서-
photo back ground-덕천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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