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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후┃2022-05-23

2022年 日常

by 詩人全政文 2022. 10. 23. 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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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성경의 한장면이 떠오른다.

삶의 애착이 누구보다도 강렬했던 비운의 여인 라헬의 이야기다.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따라 나섰다가 객사하게 되지만은,

산고를 이기지 못하고 괴로워하다가 그때 낳은 그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슬픔의 아들>라고 명명한다.

물론 야곱이 그 이름을 <베냐민..오른손의 아들>이라고 교정해 주지만,

그녀는 그렇게도 소원했던 일의 성취를 현실화시켰음에도

결국은 단명으로 그의 삶을 끝내고 말았다.

라헬을 위하여 14년동안 종살이를 할 정도로 그녀를 극진히 사랑했던 야곱은

그녀에 대한 못이룬 사랑을 요셉을 통해서 이루어 가고 싶어한다.

그래서 편애라는 소릴 들으면서도 요셉에게만은 채색옷을 입히고 싶었고,

모든 자식들을 거친 광야에 내 몰면서도 요셉은 자신의 곁에 두고 싶어 했던 것이 아니었겠는가.

이것이 화근이 되어 요셉은 형제들중에 고립되고 질시의 대상이 되다가

끝내는 형들의 손에 의하여 은 20개에 이스마엘 상인들의 손에 팔리웠고

이집트로 팔려가야 했던 아픈 과거를 가지게 된다.

20년이 속절없이 흐른뒤 그가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을 때에 근동지방의 흉년은

이들 형제를 다시 만나게 했는데, 이 때에 요셉은 형들을 향하여

<나를 이곳에 보내신이는 형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셨음을 밝히고 있다.

우린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를 보는 근시안적인 사고에 젖어 살고 있다.

그러기에 원망과 지난 세월에 대한 보상심리에 젖어 살아갈 때가 많다.

원인을 규명해야 하고, 잘잘못의 시비를 따져 선악에 대한 분명한 결론을 내려고 한다.

누가 선하고 누가 악한가에 대한 답변을 요구한다. 그러나 해피엔딩은 용서에 있다.

사건을 하나님의 섭리라는 큰 그림을 그려놓고 보면 인간의 할일은 거의 없어 진다.

20년만의 해후는 섭리안에 있는 작은 해프닝에 불과하다.

하나님이 앞서 보내셨다는 큰 구원의 틀로 보면 원망이나 시비,

그리고 억울하고 무정한 세월에 대한 보상을 요구할 수 없는 것이다.

형들이 한짓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믿는데, 더 이상 어떤 감정의 앙금이 남아 있겠는가?

우린 역사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 아니다. 역사안에 존재하는 사람들일뿐이다.

내가 용서한다는 교만까지 버릴수 있어야 한다. 내가 용서하려니까 더욱 힘이 드는 것이다.

절대 해피엔딩은 십자가의 교차점 안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앞서 보내셨다고 믿는 믿음의 토대안에서만 가능하다.

베노니로 살지않고, 베냐민으로 살아 가기 위해서라도 해후는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북 김천시 어모면 중왕리 아천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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