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근래 추억에 잠기는 일들이 반복된다.
우리 삶의 기억 안에는 ‘추억’이라는 것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나이를 먹고 늙어가는 동안 ‘추억’은 늘 한결같은 모습으로
우리의 정신세계 안에서 숨어 지내다 우리가 예견치 못할 때 불쑥불쑥 튀어나와
우리의 감정선을 이리저리 뒤흔들어 놓곤 한다.
조금은 부조화하게 생겨나는 현대식 건물과 상점들로 리모델링되는 공간속에
정지되어 있는 기억의 시간을 확인하고 싶어 했다.
휘황찬란한 새 건물만 들어섰다면 오늘날의 파리는 없었을 것이다.
효율과 기능만을 강조한 도시는 사람의 정서와 심미적인 부분을 경시하기 때문에
시민의 삶을 황폐하게 만든다.
나는 사람들의 추억을 담긴 도심의 골목길들을 없애지 말고 보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골목은 도시의 외곽에나 가야 겨우 만날 수 있는 사라져 가는 주거문화가 되었다.
골목을 만들어내는 올망졸망한 작은 집들이 재개발에 밀려 부서지고,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웃도 사라졌다. 어슴푸레한 새벽, 리어카를 끌며 부지런히 걷는 청소부 아저씨의 발자국 소리,
집 앞을 쓸려고 나온 할아버지들의 인사 소리로 골목의 하루는 시작된다.
골목은 아이들의 놀이터였지만 평상 하나만 놓이면 할머니들의 사랑방이 되기도 한다.
슬쩍 보이는 어느 집 창으로 가수가 되고 싶은 고등학생 누나의 노랫소리,
혹은 금슬 좋은 부부가 무슨 일인지 티격태격 다투는 소리가 새 나오기도 한다.
그렇게 골목이 있는 동네에서는 이웃집의 속사정까지 알 수 있다.
담벼락에 친 빨랫줄, 볕 좋은 곳에 널어놓은 고추, 시멘트를 뚫고 핀 민들레….
‘누구의 것이 아닌 모두의 것’인 골목이 있기에 가능했던 이 모든 에피소드를 조곤조곤 들려준다.
전체를 흑백의 드로잉(drawing)으로 처리하면서 아이들의 옷, 슈퍼마켓 아줌마가 든 태극부채,
불 켜진 창 등은 포인트 주듯 색을 입혀 따듯하면서도 생기가 넘친다.
글과 그림이 잘 어울리는 그림책이다.
유럽의 많은 국가들은 옛 것은 시대에 뒤처진 것이라 여겨 함부로 부수거나 망가뜨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보물처럼 다룬다. 그런 그들이 옛 것을 보존하는 방식은 가히 놀라울 따름이다.
특히 이탈리아의 콜로세움은 돌기둥들이 아무렇게나 뒹굴어 다니고,
황폐된 모습을 하고 있을지라도 인위적으로 복원하려 들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둘 뿐이다. 뿐만 아니라 피사의 사탑을 보면 우리는 그것을 더욱 느낄 수 있다.
부실공사의 한 예였던 피사의 사탑은 허물어져야만 마땅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대로 두었고,
그 결과 한 해에 어마어마한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실수였던 건축물 마저 더 각광받고 있는 것이다.
구슬치기, 딱지치기를 하다가 옹기종기 모여앉아 선배들이 들려주는 귀신이야기에
새가슴이 되던 골목길이 그리워진다. 공책을 살 돈으로 번데기를 사 먹고,
앉은뱅이 천막에서 뽑기의 십자가를 잘라내기 위해 침을 발라대기도 했지만,
어머니에게 걸려 혼난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내가 약삭빠르기보다는 어머니께서 혼을 잘 안 내는 분이셨기 때문이었다.
학교 앞에는 친구네 아버지가 하시는 만화가게가 있었는데,
우린 그 친구에게 잘 보이려 서로 경쟁을 하곤 했었다.
티비가 희귀하던 시절이라 '김일' 레스링이라도 벌어지는 날은
티비가있는 집 아이에게 비굴할 정도로 굽신거려야 했다.
우리집 옆에는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홍제의원’이 있었다.
약골이었던 나는 그 병원의 단골손님이었고,
어머니께서는 내가 주사를 맞은 날이면 비싼 ‘바나나’를 사주곤 하셨다.
얼마나 어렵던 시대인지 아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진 아이들도 많았다.
그 골목길은 애환의 거리였었다. 하지만 이 모든게 추억속으로 살아져 버렸다.
과거 빈촌(貧村) 바로 옆으로 부촌(富村)이 형성될 때 그랬듯 달동네 주민들은
그저 사회의 부수적인 존재로 전락해 버렸다. 여차하면 옆으로 치워놓으면 되는 짐짝처럼 말이다.
그들은 늘 힘없는 사회 약자였고, 당연히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이들도 없었다.
하지만 묻고 싶다.
우리는 한번쯤은 저 아이들의 사진을 보면서
혹은 영화나 드라마 속 배경에 등장한
달동네를 보면서 향수를 느끼지 않았던가.
빈티지 여행이라며 그곳을 찾아가 평안을 얻고,
추억의 골목길을 다시 걸어보고 싶어 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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