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인생이 서럽다고 느껴질 땐 시작(詩作)을 시도한다.
이 때의 시편들은 처량하고 맑은 여음(餘音)으로 하염없이 서럽다.
시적 사유는 명상적이고 고요한데 저릿저릿 온몸으로 퍼져가는 기운을 느낀다.
그 서정적인 여음속에 로뎀나무 숯불처럼 오래 꺼지지 않는 뜨거움이 있고
바람에 우는 대숲처럼 서늘한 기운도 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대부분이 고집이 세고,
고집이 센사람은 거의다 어리석다. 이들은 더욱 잘못된 관점에 집착하고 그러다 결국
어디가 어딘지 알지도 못하게된다. 그러기에 설령 자기의 의견이 정확하더라도
한발 물러나는 모습을 보여주는것이 좋다. 어떻게보면 현재의 힘든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제3자의 입장에서 한발 물러나 보는게 버릇이 되었다 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이게 사실 모든 문제해결의 방법이자 어쩌면 도 닦는 방법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한발 물러나 관조하면 더 많이 더 넓게 보인다.
“Every act of creation is first an act of destruction. 모든 창의적인 행동이란
처음에는 다 파괴적인 행동이다.” 화가 파블로 피카소의 말이다. 말하자면,
세상을 바라볼 때 한발자국 물러나서 보는 여유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실패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가 보고 싶어하는 것들만 보는 사람이다.
나도 그런 부류위 한사람이겠지만 내가 믿고 싶은 것만을 믿으려는 고질적인 병이
내 안에 있는게 사실이다. 어떤 딱 한가지의 생각에 집착이 심한 인간은
그 강인한 의지만으로 충분히 남들의 존경을 받을만도 하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는법은
간단하다 그렇지만 그 도가 지나치거나 아주 심하다면 그것은 고집으로 바뀌는법,
어떤일 어떤사람 혹은 어떤 추상적 개념에 지나치게 빠지면 자칫 잘못된 길로
들어설수있다. 신영복 선생은 그의 저서 '강의'에서 "나는 그 '자리'가 '사람'보다 크면
사람이 상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평소 '70%의 자리'를 강조한다.
어떤 사람의 능력이 100이라면 70 정도의 능력을 요구하는 자리에 앉아야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30 정도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라고 적고있다.
능력이 50인 사람이 100의 자리에 앉아있으면 그 구성원들이 불행해지고,
자신도 좌불안석(坐不安席)이 되어 눈치보기에 급급해진다. 결국 그 모자라는 부분을
거짓이나 위선 그리고 아첨으로 채우게 되는 순간 결국 자기도 파괴되고 그 자리도
파탄될 수 밖에 없다. 동양화가 서양화에 비하여 더 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여백(餘白)이 있기 때문이다. 그 여백이야말로 창조적 공간이 되고 예술적 공간이
되는 것이다. 전체를 채우는게 아니라 약간의 공백을 두어 독자의 상상력에게 맡기는
기법이야말로 동양화의 진수(眞髓)였다. 사람이 살면서 자신의 능력 이상의 것을
얻는 것은 물론 좋은 일이다. 모두가 바라는 바이다. 그러나 부(富)나 높은 자리도 좋지만,
그 이전에 그렇게 행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깜냥과 그릇을 잘 살펴, 무리하지 않고
그칠 줄 아는 것도 필요할 것 같다. 즉 자신의 분수(分數)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진정한 술꾼은 만취(漫醉)하는 법이 없다. 가장 기분좋게 술을 마시기 위해서는
'약간 알딸딸하다 싶을 때'나 '조금 아쉽다 싶을 때' 잔을 놓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 때론 가지고 누리는 것이 그러지 않은 것만도 못 할 때가 많다.
논어의 선진편(先進篇)에 보면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이 있는 데,
정도를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는 뜻으로, 중용(中庸)이 중요함을 이르는 말이다.
때로는 아쉽다 싶을 때 자리에서 물러나고 여유(餘裕)로움을 찾는게 중요한 데,
능력도 안되는 사람이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억척을 떨기에 초라해지는 것이다.
나는 작은 일에 의미를 둔다. 그래도 내 능력과 한계를 실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슬로우시티가 좋고 나이먹어 자식들에게나 남을 불편하게 하거나 주책떨지 않기 위해
내 능력의 70%를 저울질하고 있다. 아무리 높은 산이라도 하늘아래 뫼인 데,
오르지 않고 뫼만 높다 하더라는 말처럼 도전하지 않는게 문제이다.
-全政文 詩人의 ((흘러가는 시간앞에서)) 중에서-
photo back ground-속초 캔싱턴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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