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바라지┃詩人이 보는 世上┃2024-06-28

2024年 日常

by 詩人全政文 2024. 6. 28. 00:26

본문

 

 

'바라지'란 원래 절에서 재(齋)를 올릴 때 법주(法主) 스님을 도와 경전을 독송하고

시가를 읊는 스님을 일컫는 말이다. 죽은 영혼들의 극락왕생을 비는 의식인 재에서,

바라지 스님은 법주 스님을 도와 목탁을 치고 경전을 읊고 향(香)과 꽃과 차(茶)를 올린다.

바라지 스님이 이처럼 자잘하고 수고스러운 일들을 해준다는 데서 ‘뒷바라지하다’,

‘옥바라지하다’ 등의 말이 생겨났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한 줄기 햇빛처럼,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서 따뜻함과 위안을 건네주는 것이

‘바라지’인 것이다. 감옥에 갇힌 죄수에게 바라지하는 일을 ‘옥바라지’라 하고,

아기 낳는 일을 도와주는 일을 ‘해산바라지’라 한다.

또, 들일을 하는 사람에게 음식을 만들어 가져다주는 일은 ‘들바라지’이다.

마찬가지로 술을 대접할 때 옆에서 안주를 장만하여 대주는 일 또한 ‘안주바라지’라 할 수 있다.

자질구레한 심부름을 맡아 하는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로 '따까리'란 말이 있다.

바라지와 비슷한 말 가운데 ‘치다꺼리’가 있다. 흔히 “네 녀석 치다꺼리하느라 이

렇게 늙어버렸다.”처럼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치다꺼리’는 일을 치러 내는 일인데,

‘입치다꺼리’라 하면 “먹는 일을 뒷바라지하는 것”을 좀 낮추어 이르는 말이다.

“일곱 자식 입치다꺼리에 손에 물마를 날이 없었다.”와 같이 쓴다.

나는 자식 '치다꺼리'라는 말을 한번도 의도적으로 사용해 본적이 없었고

그 걸 치다꺼리라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세상 부모들이 모두 하고 있는 내리사랑을 했고

그것으로 내 할 본분을 다했을뿐이라고 믿고 있다. 지금에 와서 지난 시절을 반추해 보면

부모님의 희생적인 사랑이 없었다면 오늘의 내가 존재 할 수 없었을 것인데

내가 잘난줄로 착각을 했고 시건방을 떨었던 걸 후회한다.

한번도 입밖에 꺼내 보신적이 없었지만 오랜 세월동안 'supporter'해주신

그 희생과 조력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다는 걸 근래에 더 자주 느끼게 된다.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주님도 혼자 일을 하신 분이 아니시며 조력자, 협력자가 있어

구원 사업을 완성하려고 하셨으며 세상 끝날까지 교회는 가장 큰 협력자가 되어야 할 것을

당부하셨다. 열두 사도와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 그 외 다른 여자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시중을 들었다. 옥합을 깨틀였던 여인을 세상 끝날까지

기억하라고 명령하셨다. 세상에는 독불장군이 없는 법이다.

그렇다면, 내가 누군가의 도움과 성원이 있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젠 나도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로 살겠다는 다짐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인생 일모작 시절에는 도움을 받으며 살아왔지만 인생 이모작이 시작되는 시점에는

이제 시혜까지는 아니더라도 받았던 걸 돌려주고 떠날 시점이란 걸 인식하고 있다.

 

-全政文 詩人의 ((흘러가는 시간앞에서)) 중에서-

photo back ground-서동공원과 대나무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동고도리 533-1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