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고독해지는 이유는
주변에 사람이 없기 때문이 아니고 환경이 좋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이 문제를 신학적인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 신라 말 학자. 문장가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오언절구에 보면, "秋風惟苦吟 世路少知音 窓外三更雨 燈前萬里心"이란 싯귀가 있다.
'쓸쓸한 가을바람에 괴로워 읊조리는데, 이 세상 뉘라서 내마음 알아주리,
삼경 깊은 밤 창밖에 비는 내리고, 등불앞에 초조한 심사 만리를 달리네'라는 해석이다,
비오는 가을밤에, 자신을 알아줄 지기(知己)가 없는 외로움을 노래한 작품이다.
세상에 자기를 알아줄 만한 사람이 없다는 절대 고독감을 표현했다.
최치원은 1천2백년전 고대 한류의 원조였다. 그는 젊은 나이에 당나라에 유학,
과거에 합격하고 관리가 되었다.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써
난을 진압하는 결정적 동기를 이루었고 당대 중국 지식인들을 감동시켰다.
당시 시정에서는 ‘난군을 진압한 것이 군사력이 아니라 최치원의 글이다.’라는
유행어가 나돌 정도였다고 한다. 난이 평정된 후 희종(僖宗)은 최치원에게
자금어대를 하사한다. 자금어대는 황제가 정5품 이상에게만 하사하는 붉은 주머니.
고운의 격문은 천 수백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역사 문학을 전공하는 중국 전문가들을
감탄시키고 있다. 중국에서 과거에 급제하고 국제적으로 문명을 날렸으나 귀국해서는
6두품 출신이라는 신분상의 한계 때문에 쇠망한 조국을 되살려 보려는 포부를 펼치지 못한
그의 통한은 “가을바람 쓸쓸하게 불어오는데, 세상에는 날 알아주는 이 드무네”
(秋風惟苦吟, 世路少知音)라는 그의 시구에서 진하게 묻어난다. '날 알아 주는'이라는
말속에 문제의 해결이 담겨져 있다. 날 알아 주는 친구나 가족이 없는 사람이
고독하다고 말할 순 없지만 알아주는 사람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천양지차일 것이다.
교인이라면 누구나 집안에 성경구절 족자 하나씩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도 '목양일념'이란 목판 하나를 늘 걸어두고 있었다. 내가 어느 노인의 집을 방문했을 때
내 마음을 뭉클하게 만들었던 성구는 '온세상 날버려도 주예수 안버려'라는 빚바랜 족자였다.
그 연세이면 자식을 의지하거나 친구 하나쯤 만들어 서로 의지하며 살아도 될텐데
세상이라는 태산을 넘기에 너무 힘들었나 보다. 이런기분을 한두번 안느껴 본 사람이
어디 있을까? 자신에게 얼마나 이익이 있느냐에 따라 잇속을 따라 세상이 돌아 간다.
내가 현역시절이나 지금이나 가장 애창하는 곡이 있다면 '주는 저산밑에 백합'이란 곳이다.
"내 진정 사모하는 친구가 되시는 구주 예수님은 아름다워라.
내 맘이 아플 적에 큰 위로되시며 나 외로울 때 좋은 친구라.
내 몸의 모든 염려 이 세상 고락간 나와 항상 같이 하여 주시고
시험을 당할 때에 악마의 계교를 즉시 물리치사 날 지키시네.
온 세상 날 버려도 주 예수 안버려 끝까지 나를 돌아 보시니
주는 높은 산성 내 방패시라."
항상 입에 달고 사는 찬송인데,
그 중 2절 세번째 소절에 있는 '온세상 날버려도 주 예수 안버려'하는 소절인데
세월이 지날수록 더 애틋하게 부르게 된다.
요즘도 흥얼 흥얼 거리며 하루에도 여러번 되뇌이면서 부르고 또 부르고 한다.
그럴 때 마다 어김 없이 내 눈에는 눈물이 맺힌다.
살면서 고비 고비 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 까지, 주 예수께서 함께 하심을
나타내 주심으로 늘 위로하심 속에 지금까지 수많은 태산을 넘어왔고,
또한 앞으로 넘어야 할 태산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많큼 많이 있다고 생각할 때
이 찬송은 멈추지 않을 것같다. 지금까지 넘어 온 것도 크고 힘이들어 숨막히듯
힘들고 지치고 어려웠는데 앞으로도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넘어 설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아마도 최치원이가 이 시대를 살았다면 '이 세상 뉘라서 내마음 알아주리'라는 절규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온 세상 날 버려도 주예수께서 안버리신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지금 내가 혼자라는게 두려운게 아니라 주님이 날 버리시지 않을 거라는
확신과 믿음이 중요하다.
-全政文 詩人의 ((흘러가는 시간앞에서)) 중에서-
photo back ground-사포나루
전남 함평군 학교면 곡창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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