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전 미국 버지니아공대에서 한국인 조승희(23) 씨가 총기를 난사하여
32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죽은 전대미문의 사건이 일어났다.
이 후 안식과 평화를 기원하는 내용의 편지가 캠퍼스 내 추모석 앞에 잇따르고 있는데,
참사의 희생자는 32명이 아니라 33명이라고 적혀있다.
총기를 난사한 한국인, 조승희 씨의 이름도 33인의 추모석에 네 번째로 자리잡고 있었다.
걸핏하면 ‘네탓이오’가 만연한 한국사회에 큰 교훈을 주는 이야기이다.
"너를 미워하지 않아." "네가 그렇게 절실히 필요로 했던 도움을 받지 못했다니 가슴이 아프다.” 등
등의 추모시가 등장했는데, 그곳에서 조씨는 많은 청춘의 목숨을 무참하게 앗아간
‘학살의 주범’이 아니었다. 미국사회가 따뜻하게 보살피지 못했기 때문에 반사회적으로
변질된 또다른 ‘희생자’였다는 자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원망이나 미움은 없었다.
거기엔 안타까움과 용서만 남아 있었다. 미국의 성숙한 시민사회가 보여주는 ‘내 탓이오’는
반대로 ‘네 탓이오’에 익숙한 우리에게 충격과 함께 감동을 주고 있다.
미국사회를 새롭게 봐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버지니아공대에는
"내 자식 살려내라. 누가 책임질 것이냐"는 악다구니도 없이
조용히 ‘나와 우리의 탓’으로 문제를 돌렸다. 미국은 이름 표기마저 한국식 ‘조승희’에서
미국식 ‘승희조’로 바꿨다. 미국 내에서 생활하던 ‘미국인’이며 미국사회의 탓임을 다시 한번
분명히 한 것이다. 버지니아공대에 가보면 한국인이라는게 머슥해 진다.
그게 미국인과 한국인의 차이인가? 남탓할 필요가 없다.
서양 속담에 자신이 한 말을 가장 먼저 듣는 것은 자기 ‘귀’라는 말이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뱉은 말들이 자신도 모르게 의식을 좀먹을 수 있다.이미 그런 습관이 들었다면
의식적으로 바꿔야 한다. 옛말에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고 했다. 현명한 명필이라면
정말 형편없는 붓을 들고도 불평하지 않으며 설령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붓을 탓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돌아보게 되기 때문이다.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고향에서 쫓겨났다. 가난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다. 배운 것이 없다고 힘이 약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글자라고는 내 이름을 쓸 줄 몰랐다. 자모카르를 당할 수 없으며 힘으로는
내 동생 카자르한테도 졌다. 대신 남의 말에 항상 귀를 기울였고 내 귀는 나를 현명하게 가르쳤다.
나는 힘이 없기 때문에 평생 친구와 동지들을 사귀었다.
빰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가 살아나기도 했다.
가슴에 화살을 맞고 꼬리가 빠져라 도망 친 적도 있었다.
나는 숨을 쉴 수 있는 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알고 보니 적은 밖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깡그리 쓸어버렸다.
나 자신을 극복하자. 나는 칭기즈칸이 되었다. '태무진이 젊은 날에 환경이나 남을 탓했다면
그는 평범한 양치기에 불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냘 양치기로 살고 싶은 마음이 더 강열하다.
지금에 와서 내가 징기스칸이 될 수도 없지만 된다고 해도 의미가 없을 나이라는 생각이 들어
평범한 사람이 되기를 작정했었다.
다만 누구에게도 손해와 고통을 주지 않고 가능하면 인간답게 살기를 열망한다.
-全政文 詩人의 ((흘러가는 시간앞에서)) 중에서-
photo back ground-진안 마이산 벗꽃 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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