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께서는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인도 하시니'를 즐겨 부르셨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길이 순탄한 길은 아니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도 자식들이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하여 언제나 기도 제목으로 삼으셨다.
나 역시 그걸 모방하고 있다. 내 자식의 길이 순탄하길 소원하고 기도 제목으로 삼는다.
‘길’은 길의 받침 ‘ㄹ’의 모양처럼 길게 늘어져 길이 되었을 것 같다.
거칠고 힘이 들기에 때론 내가 대신 걸어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가지고 있다.
대신 살아줄 순 없지만 부모의 마음이란 항상 이럴게다. 즐거움은 본인들의 묷이고
어려운 일은 내가 대신해 줄 수 있다면 그렇게 라도 해 주고 싶은 심정이다.
러시아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작품 활동을 했던 작가 로맹 가리(1914-1980).
1980년 12월 2일 오후가 저물 무렵, 로맹 가리는 자신의 침대에 누워 권총을 입에 물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의 유서 마지막 줄엔 “나는 마침내 나를 완전히 표현했다”라고
쓰여 있었다. 그의 단편소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Les oiseaux vont mourir au P rou)'를
다시 음미했다. 새들은 페루의 리마 북쪽10Km쯤 떨어진 해안에 널브러져 죽는다.
왜 새들은 페루로 가서 죽는 걸까? 정확하게 말해 새들은 왜 먼 바다의 섬들을 떠나
리마 북쪽에 있는 이 해변에 와서 죽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다만 새들에게는 이곳이 믿는 이들이 영혼을 반환하러 간다는 인도의 성지 바리나시 같은
곳일 수도 있었다. 사람은 홀로 태어나 홀로 죽는다.
처음에도 혼자였고, 마지막도 결국 혼자다.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끊임없는 대화를 나누며 사회라는 공동체를 이루지만, 인간은 본질상 ‘고독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새들은 혼자 날아오르고 혼자 떨어져내린다. 무리를 지어 날더라도
다른 새의 날갯짓을 대신 해 줄 수는 없다. 그래서 태초의 생명이 올라왔을 바닷가 언저리
어딘가에서 삶의 끈을 놓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제가 온 곳으로 돌아가는 것..고독의 끝에서 절망과 타협하며 희망을 지키는 것은
어쩌면 죽음이라는 댓가를 필요로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만이 돌아갈 곳을 알지 못하고 아둥바둥한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는다는 데,
그 끝이 어딘줄도 모르고 허둥대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이 애처롭게 보인다.
언제가도 좋은 절경 동해 바닷가 에 감탄이 쏟아진다. 천국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테지만......
-全政文 詩人의 ((흘러가는 시간앞에서)) 중에서-
photo back ground-다시찾은 동해바다를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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