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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조┃詩人이 보는 世上┃2024-06-08

2024年 日常

by 詩人全政文 2024. 6. 8.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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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내 삶을 반추해 보면, 심한 도수의 안경을 낀 것처럼 어찔어찔하다.

움직이는 동적(動的)인 세상에서 움직이지 않는 정적(靜的)인 세상으로 살고자 하니

내 수양이 훨씬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 이득을 위한 것이건 상대방을 위한 것이든 간에

이세상의 각종 사태와 이치를 알고자 하면 반드시 관조(觀照)하는 습관과 능력을 갖춰야 한다.

번잡하지 않고 고요히 생각할 여건을 만드는 관조(觀照)의 힘이랄까?

그런 전통이 존재했었다. 나는 삶의 애착이 누구보다도 강렬했던 비운의 여인 라헬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따라 나섰다가 객사하게 되는 데,

산고를 이기지 못하고 괴로워하다가 그때 낳은 그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슬픔의 아들>라고 명명한다. 물론 야곱이 그 이름을 <베냐민..오른손의 아들>이라고

교정해 주지만은, 그녀는 그렇게도 소원했던 일의 성취를 현실화시켰음에도

결국은 단명으로 그의 삶을 끝내고 말았다. 라헬을 위하여 14년동안 종살이를 할 정도로

그녀를 극진히 사랑했던 야곱은 그녀에 대한 못이룬 사랑을 요셉을 통해서 이루어 가고 있었다.

그래서 편애라는 소릴 들으면서도 요셉에게만은 채색옷을 입히고 싶었고,

모든 자식들을 거친 광야에 내 몰면서도 요셉은 자신의 곁에 두고 싶어 했던 것이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요셉은 형제들중에 고립되고 질시의 대상이 되다가

끝내는 형들의 손에 의하여 은 20개에 이스마엘 상인들의 손에 팔리웠고 이집트로 팔려가야 했던

아픈 과거를 가지게 된다. 20년이 속절없이 흐른뒤 그가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을 때에

근동지방의 흉년은 이들 형제를 다시 만나게 했는데, 이 때에 요셉은 형들을 향하여

<나를 이곳에 보내신이는 형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셨음을 밝히고 있다.

우린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를 보는 근시안적인 사고에 젖어 살고 있다.

그러기에 원망과 지난 세월에 대한 보상심리에 젖어 살아갈 때가 많다. 원인을 규명해야 하고,

잘잘못의 시비를 따져 선악에 대한 분명한 결론을 내리고 싶어 한다.

누가 선하고 누가 악한가에 대한 답변을 요구한다. 그러나 해피엔딩은 용서에 있다.

지금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하나님의 섭리라는 큰 그림을 그려놓고 보면

인간의 할일은 거의 없다. 20년만의 해후는 섭리안에 있는 작은 해프닝에 불과한 것이고,

하나님이 앞서 보내셨다는 큰 구원의 틀로 보면 원망이나 시비, 그리고 억울하고 무정한

세월에 대한 보상을 요구할 수 없는 것이다. 형들이 한짓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믿는데,

더 이상 어떤 감정의 앙금이 남아 있겠는가? 우린 역사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 아니다.

역사안에 존재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용서한다는 교만까지 버릴수 있어야 한다.

내가 용서하려니까 더욱 힘이 드는 것이다. 절대 해피엔딩은 십자가의 교차점 안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앞서 보내셨다고 믿는 믿음의 토대 안에서만 가능하다. 베노니로 살지않고,

베냐민으로 살아 가기 위해서라도 해후는 필연적으로 있어야 했고 요셉은 그걸 실천했다.

그래서 요셉은 위대한 인물이다. 총리가 되었기 때문에 위대한 인물이 된게 아니다.

요즘은 너무 생각없이 산다. 어떻게보면 현재의 힘든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제3자의 입장에서

한발 물러나 보는게 버릇이 되었다 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이게 사실

모든 문제해결의 방법이자 어쩌면 도 닦는 방법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한발 물러나 관조하면 더 많이 더 넓게 보인다.

“Every act of creation is first an act of destruction."

모든 창의적인 행동이란 처음에는 다 파괴적인 행동이다. 화가 파블로 피카소의 말이다.

세상을 바라볼 때 한발자국 물러나서 보는 여유가 필요하다.

실패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가 보고 싶어하는 것들만 보는 사람이다.

나는 할 일없어 심심해 죽는 것보다 일하다 죽어야겠다고 작정했었다.

죽기 이틀 전까진 일하다 죽어야겠다고 결심하니 일이 힘든 것보단 일을 마치고

느끼는 성취욕에 마음이 한결 편해질 정도였다. 몸은 편하지만 마음이 병들어가는 사람보다는

몸은 부서지지만 마음만큼은 매일 청춘인걸 확인하며 사는 생활이 즐겁기만 했다.

하지만 큰 고비를 넘기고 나니 심신이 부서지는 기분이 든다. 약간 쉬면 컨디션이 좋아질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조만간 게으름의 시간을 가져 보려 한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심심해서 죽을 사람이 아니라 바뻐서 죽을 것만 같은 삶이 아직 주어진 걸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러다간 바뻐서 죽을 시간도 없을 것만 같다.

요즘은 시골도 출퇴근 시간은 물론 낮시간에도 러쉬아워(rush hour)처럼

차량들로 정체가 빚어진다.

남편이 출근하면 아내들이 차를 몰고 거리로 쏟아진다. 공원이나 까페를 가득 채운다.

하루종일 죽어라 땅을 파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심심해서 죽을 사람들로 넘쳐 난다.

말인즉, 정말 심심해서 죽을 지경인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全政文 詩人의 ((흘러가는 시간앞에서)) 중에서-

photo back ground-미생의 다리

경기도 시흥시 갯골생태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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