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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을 위한 행진곡┃詩人이 보는 世上┃2024-05-26

2024年 日常

by 詩人全政文 2024. 5. 26.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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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때인 1925년 당시 사상 최대 규모였던 김제 광활면 간척사업에는

전국 각지에서 생계가 막연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또는 반강제로 동원되었다고 한다.

광활면의 넓은 들은 또한 대하소설 ‘아리랑’의 무대이기도 하다. (광활면소재지 부근과 망해사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지평선과 낙조가 새로운 자연의 묘미를 선사한다.)

공사가 끝난 뒤 개펄은 농사를 짓는 땅이 되고, 간척사업에 참여한 외지 사람들은

거의 그 ‘개 땅’에 소작인으로 눌러앉았다. 그들은 초기에 수확량의 70%를 소작료로 내야 했으며,

나락 한 톨만 훑어내도 쫓겨나는 핍박을 당했다.

그들은 간척지에서 인고의 삶을 사는 자신들을 가리켜 ‘개땅쇠(개펄 땅에 사는 서민들)’라 불렀다.

그 말 속에는 당시 일제하 소작농들의 민중적 삶의 애환이 들어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개땅쇠’라는 말은 그 이후 앞에 특정 접두사가 얹혀 가끔 지역차별적인 의미로

쓰이곤 한다.  과연 전라도가 그리 만만한 곳인가.

본격적인 산업화가 시작되기 전인 농경사회에서  전라도는 국부를 창출한 중심지였다.

기본적으로 넓은 평야를 가진 자연적 조건이 좋았던 때문이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백제시대 만들어진 김제 벽골제는 안정적인 물을 확보하고자 했던 개척정신이 숨어 있다.

전라도 사람들을 비하하는 말의 하나인 ‘개땅쇠’의 본래 의미도 땅을 개척하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김제 광활면과 부안 개화도 간척이 이뤄졌고, 현재 진행 중인 새만금사업이 결코 우연이

아닌 셈이다.  전라도는 또 역사의 격변기마다 그 중심에서 목소리를 냈다

이순신 장군은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고 했다.

부패한 권력과 외세침탈에 맞서 분연히 일어났던

동학농민혁명, 일제강점기 광주학생운동, 독재권력에 맞선 광주민주화운동 등 잘못된 사회를

바로잡으려고 온몸을 던진 곳이 바로 전라도며 전라도 사람들이었다. 문화예술의 꽃을 피우며

가장 한국적인 문화들을 간직한 곳이 전라도다. 이렇게 우리의 오늘이 있기까지 밑거름 역할을 한

전라도가 국토의 변두리로 처진 것은 산업화 이후 반세기 남짓이다.

한국 정치사에 있어 풀리지 않는수수께끼로 남아있으며

여전히 국가발전의 장애로 작용하고 있는 ‘지역감정은 그 해악에 대한

수많은 지적에도 불구하고 선거때마다 단골메뉴로 등장하고 오늘날의 정치판도 지역감정의 벽을

극복하지 못한 채 휩쓸려가고 있는 형편이다. 이러한 망국적인 지역감정의 근거로

흔히 고려 태조 왕건이 유훈으로 남겼다는 '훈요십조(訓要十條)'가 거론되는 데, 제8조에 보면

'내가 죽은 후, 차현 이남과 금강 외의 사람들에게 벼슬을 주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지고 있다.  군산 앞 바다에 이르는 금강의 물줄기를 보면,

지금의 금강은 덕유산 장수 수분령에서 발원하여

옥천을 거쳐 공주에서 한양 쪽으로 흐르지 않고, 한양을 등지고 군산 앞바다로 흐르고 있다.

즉, 임금이 있는 한양을 등지고 흐른다 하여 왕권을 위협하는 인재들이 나온다는 것이다.

바로 금강이 계룡산을 싸고 돌아 가기 때문에 금강 이남 사람들은 언제든지 반역을 한다고

믿었다는 말인 데, 그래서인가, 풍수지리가들은 역적들이 많이 나오는 땅으로 지칭했다.

그러나 지역차별의 내용을 담고 있는 훈요십조에 대해서는 왕건이 당대에 지은 것이 아니라

후대에 조작됐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제기되고 있다. 

오늘 인터넷을 통해 '임을 위한 행진곡'을 열번 이상 들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때까지 흔들리지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소설가 황석영씨가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옥중 시

‘묏비나리’의 일부를 차용해 노랫말을 붙였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그렇게 탄생했고

1980년대 이후 민주화현장에 항상 있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제목은 행진곡이지만

이 노래는 사실은 진혼곡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0년대 내내 대학과 거리에서 불려졌다.

이제는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말레이시아, 중국, 일본, 대만, 홍콩의 시민들도

자기네 말로 부른다. 때로는 록으로 때로는 발라드로 장르를 넘나들기도 한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우리나라 민주주의 상징이며 세계의 역사가 된 노래다.

이 아름다운 노래가 한 떄 금기시된 적이 있었다. 이 노랠 따라 부르면 좌파 빨갱이 취급을

받기도 했었다. 광주가 원하고 유족들이 원하는 데, 왜 그걸 굳이 막아야하는지 의아하다.

자식죽고 남편죽은 유족들의 아픔을 먼저 생각해주어야 하는게 상식적으로 옳다.

개땅쇠들이라 그런가? 노비, 기생, 광대, 백정, 공장(工匠), 무당, 승려, 상여꾼이

조선시대의 여덟 가지 천한 사람들이었다. 아마 인류 역사상, 약 5천년 전,

아마도 훨씬 그 전에도 때지어 살면서 힘으로만 세워진 서열이 있어서 ‘주먹치기, 발차기,

팔로 목조르기, 머리로 박치기 그리고 입으로 물어뜯기’로 강한 수컷들이 약한 사람들을

부려먹으며, 일 말고도 여러 가지로 못 살게 굴었을 것이다.

 

-全政文 詩人의 ((흘러가는 시간앞에서)) 중에서-

photo back ground-조문국사적지 작약

경북 의성군 금성면 대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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