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가혹한 달이라고 했던가.
T. S. Eliot은 194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에서 태어나 영국으로 이주한) 영국 시인이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탁월한 통찰, 문명과 문화에 대한 예리한 비판. 마티스, 샤갈, 모네가
색채의 마술사라면, 엘리엇은 언어 표현의 마술사이다. 눈부시게 아름답고 유창한 언어 표현 덕분에
그의 시집에 인쇄된 시 전체가 뮤지컬 <캣츠> 넘버의 가사가 되었다. 하지만, 엘리엇에게
전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한 문장은 누가 뭐라 해도 '황무지(The Waste Land)'의 첫 줄
'4월은 가장 잔인한 달(April is the cruelest month)'이다.
생명이 약동하는 4월이 가장 잔인한 것은
죽음과 같은 삶을 강요당하는 현실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로
'4월은 잔인한 달'이란 역설이 많은 공감을 얻게 된다. 아마도 4.19혁명 때문일 것이다.
수많은 젊음과 숭고한 영혼이 무고한 붉은 피를 뿌려야 했다는 점에서 1960년의 4월은
자유가 약동하는 빛나는 꿈의 계절이었을 것이다. 목숨을 걸고 자유라는 이념과 민주주의라는
체제를 지향하기 위하여 저항한 사람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는
요원했었을 것이다. 이처럼 4월은 한국의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세력에겐 의미가 남다르다.
이상화(1901~1943) 시인이 나라 잃은 슬픔을 피를 토하듯 절규한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엘리엇의 `잔인한 봄`과 오버랩된다. 일반적으로 많은 시인들은
봄을 `밝음 탄생 생명 이상 기쁨` 등 긍정적이며 희망적 이미지로 표현하지만 엘리엇의 봄과
이상화의 봄은 전혀 딴판이다. 대한민국의 단면을 보는듯 싶다. 그래서 봄이 되었지만 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모두 옮겨 심은 나무들이라 올핸 꽃도 피지 않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드는게 사실이다. 그러나 엘리엇이 말한 잔인함은 그런 황폐함조차 이겨내고 언 땅을 뚫고 나오는
놀라운 생명의 강인함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면 잔인하지만 그 속에 놀라운 생명의 신비를
발견할 것이라는 희망을 말하고 있다. 봄은 생명의 부활이다. 죽음과 절망조차 이겨내는
라일락의 소생과 마른 구근의 부활은 그래서 그냥 잔인한 게 아니라 ‘가장 잔인한(the cruelest)’
봄의 고백이다. 봄비로 잠든 뿌리를 흔들어 생명을 일깨워야 하는 고통을 감내하더라도
`잔인한 달`로 불리는 4월이 가기 전에 보이지 않는 현실의 벽에 빛이 넘치는 변화가 오면 좋겠다.
-全政文 詩人의 ((흘러가는 시간앞에서)) 중에서-
photo back ground-마이산 은수사
전북특별자치도 진안군 마령면 마이산남로 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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