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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서울 광진구 중곡동┃韓國... 山河┃2013-10-24

산행

by 詩人全政文 2022. 10. 6. 0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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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 (峨嵯山)
소재지 : 서울 광진, 경기 구리    산높이 : 287m

평강공주와 온달장군의 사랑이 얽힌 아차산 !!

온달장군은 고구려 영양왕1년(590년)에 전사한 고구려 장군으로 많은 전설과 이야기를 남긴 실존인물이다.
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기록돼 있고, 지금도 아차산에는
온달에 얽힌 유적과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이곳에는 온달장군이 눈을 감은 곳이라고 전해오는 아차산성과 온달장군이 마셨다는 온달샘이 있다.
온달의 전사 후에 상여가 움직이지 않아 평강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죽고 사는 것이 결정됐으니,
아아∼이제 돌아갑시다"하니 상여가 움직였다고 하는 슬픈 애사도 남아있다.

사면이 산으로 둘러 쌓여 있는, 서울에는 등산을 할 만한 여러 명산이 많이 있습니다.
아차산은 높이가 비교적 낮고, 완만하여 가족단위의 가벼운 등산 또는 전문적이지 않은

그룹의 단체 산행 등에 어울리는 산입니다. 또한 아차산은 삼국시대 및 고구려시대를 거치며

여러 유적지들이 남아 있는 역사적인 산이고, 최근에는 지자체에서 공원 및 각종 시설을 정비하여

등산을 하기에 아주 편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주말이면 광진구 중곡동 아차산역 일대에는 등산을 하려는 등산객들로 인파를 이루고 있고,

평일에도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습니다. 특히, 아차산 주변에 어린이대공원도 있고,

아차산에 생태공원등도 잘 갖추어져 있으며,

아차산은 어린이들도 오르기에 무리가 없는 산이어서

아이들을 데리고 주말소풍을 찾는 가족들도 많은 산 입니다.

 

서울의 한강 북쪽의 아차산에는 봉화가 있었고, 그 아래 사형장이 있었다.
명종 때 홍계관이라는 점쟁이가 있었는데 어찌나 점을 잘 보는지 그 소문이 임금님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명종은 홍계관을 궁궐로 불러 그의 능력을 시험해 보고자 하였다.
임금은 홍계관의 앞에 미리 준비한 상자를 놓고서는 그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아 맞추어보라고 하였다.
만약 맞추면 푸짐한 상과 벼슬을 내릴 것이며, 틀리면 백성의 마음을 어지럽게 한 죄로
당장 사형을 시킬 것이라고 하였다.

한참 동안 상자를 꿰뚤어 보던 홍계관은 이윽고
     "쥐가 들어가 있사옵니다"
라고 고하였다. 명종은 깜짝 놀랐지만 다시 한번 물었다.
     "쥐가 몇 마리나 들어있느냐?"
그러자 당황한 홍계관은
     "두 마리 아니 세 마리 이옵니다"
라고 고하였다. 그러자 명종은
     "네 이놈 틀렸다. 여봐라 당장 저 놈의 목을 쳐라"
하고 명령을 하였다.
홍계관이 사형장으로 끌려간 후에 명종은 '아차!'하면서 신하에게 그 상자안에 암놈이 들어있었는지를 물었다.
신하는 암놈과 수놈이 각각 한 마리씩 들어있었다고 하자 명종은 암놈의 배를 갈라보라고 하였다.
암놈의 배를 갈랐더니 새끼를 배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명종이 급히 사형장으로 신하를 보내었으나 이미 홍계관은 죽고 말았다.
이후로 홍계관의 사형이 집행된 이 곳을 아차산으로 부르게 되었다

 

아차산은 해발 300m가 채 안 되는 야트막한 산으로 오르는 길도 완만하고 정비가 잘 되어 있어
등산이라기보다 가볍게 산책하기에 좋은 곳이다. 삼국시대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아차산은
고구려의 온달장군이 전사한 역사의 현장이자 남한에서 고구려 유물이 가장 많이 출토된 의미 깊은 곳이다.
아차산 생태숲길은 광나루역을 들머리로 해서
아차산 생태공원~아차산 소나무숲~아차산성길~낙타고개~고구려정~해맞이광장~
아차산 정상~대성암~낙타고개~계곡길~만남의 광장으로 돌아 나오는 것이 일반적인 코스(약 6.7km)로
쉬엄쉬엄 걸어도 3시간이면 충분하다.

 

온달의 생애는 김부식(金富軾)이 지은 '삼국사기' 열전의 '온달전(溫達傳)'을 통해 매우자세하게 전해 온다.
실로 이후 온달(溫達)을 언급하는 거의 모든 기록은 이 전기(傳記)' 모습을 묘사하였다.
온달전은 삼국사기 권45 열전5에 수록되어 있다. 열전(列傳)은 역사상 특기할 만한 개인의 행적을
후대(後代)에 전하여 교훈으로 삼고자 하는 의도에서 쓰여진 것으로,
열전에 따라서는 역사적 사실에다 허구적(虛構的) 요소를 가미시켜 재미와 흥미를 주는 내용으로
각색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온달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거친숨을 몰아쉬며 암석을 밟고 오르다보면 고구려정이 보입니다

서울시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첫 해를 바라보는 해맞이 장소이자
등산객들의 가뿐 숨을 편안하게 해주는 쉼터로 한결같은 사랑을 받아온 아차산 팔각정이
2009년 7월에‘고구려정’으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지붕엔 옛날 고구려때 궁에서 사용했던 전통문양이 새겨진 기와를 그대로 만들어 올렸다.
아차산 홍련봉에서 발굴된 연화문와당과 북한 강서대묘에서 출토된 유물을 바탕으로 황토색 기와를 재현해 냈다.
대들보와 기둥 등의 목재료도 금강송과 육송 등을 사용했고, 고구려 전통양식 기와문양과 색상을 사용했다.
뿐만 아니라 LED 조명등을 도입해 야간에도 멋있는 경관을 연출하며 등산객에게 이정표 역할을 담당한다.
“고구려정은 아차산이 갖는 역사적․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는 랜드마크이자
서울시민들과 등산객들의 많은 사랑을 받는 장소로서의 명성을 앞으로도 이어갈 것”이다.

 

고구려정에서 다시 돌아 나와 낙타고개에서 이어지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큼지막한 무덤을 사이에 두고
두 갈래 길로 나뉜다. 오른쪽은 대성암, 왼쪽은 해맞이광장으로 가는 길이다.
이곳에서 해맞이광장을 지나 아차산 정상으로 이르는 길을 광개토대왕길이라 하는데
이 길목에 보루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두 갈래 길에서 왼쪽 나무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구불구불 바위길이 펼쳐진다. 넓고 완만한 바위길을 오르다 보면 유독 넓은 바위마당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해맞이광장이다. 매년 1월 1일 해맞이행사가 열리는 곳으로
신년을 맞이하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이곳 역시 서울우수조망명소로 지정된 곳으로
유유히 흐르는 한강 줄기와 서울 시내를 한눈에 굽어보다 보면 가슴이 절로 확 트이는 느낌이다

 

해맞이광장에서 10분 정도 오르면 제1보루에 이어 평탄한 소나무숲길 끝에 5보루가 나온다.
이곳을 지나면 다시금 완만한 바위길로, 목재데크 전망대 밑에는 바위틈을 비집고 나온 소나무가 눈길을 끈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사방으로 뻗은 가지가 우아하면서도 강인한 자태를 보여
'아차산 명품소나무 제1호'로 명명되었다. 그 위쪽으로 '명품소나무 제2호'도 있지만 모양새에 있어 1호만은 못하다.

 

아차산 보루

아차산은 용마산과 망우산 등 주변 산과 능선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조선시대까지 이 모두를 아차산이라 했다.

아차산에는 능선을 따라 봉우리마다 '보루'라고 하는 군사 육적이 20여개나 있습니다.

 

아울러 둘레 450m로 아차산 줄기의 보루 중 가장 큰 것으로 알려진 3보루를 지나면 왕릉처럼 완만하게 솟아오른
구릉 형태의 여느 보루들과 달리 성벽을 쌓아 분위기가 사뭇 다른 4보루가 나오는데
이곳이 바로 아차산 정상이다. 정상이라고는 하지만 앞쪽에 더욱 높이 솟아 있는 용마산이 있어
정상이라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는다.

 

백제가 세우고 고구려가 빼앗았다가 신라가 최종 점령한 아차산성 곳곳에는 보루가 조성되어 있다.
보루는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방어하기 위해 능선을 잇는 봉우리에 만든 요새로 삼국시대 당시
고구려가 만든 것이다. 산성길을 따라 한 굽이 넘으면 내리막과 오르막이 번갈아 길게 이어지는
나무계단길이 펼쳐진다. 이곳이 바로 그 모양새가 마치 낙타의 등과 같다 하여 이름 붙은 낙타고개이다.
가운데 폭 파묻힌 길목에는 널찍한 나무마루 쉼터가 있어 잠시 숨을 고르다 가기에 좋다.
낙타고개를 지나자마자 왼편으로 살짝 비켜 들어가면 고구려정이 나온다.
정자 밑으로 넓게 펼쳐진 암반에 걸터앉아 한강을 중심으로 시원스럽게 펼쳐진 서울을 내려다볼 수 있다

 

'보루'란?

적의 침입을 막거나 적의 움직임을 살피기 위해 주로 산꼭대기에 만들어진 요새를 말합니다.

점령지로서 일반인이 거주했던 산성과는 다릅니다.

교통로 확보를 위한 전망과 감시가 주요 기능입니다.

 

삼국시대에 백제와 신라에게는 한강유역은 중국과 교류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교통요지였다.

남진정책을 펼치던 고구려에서도 반드시 확보해야만 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아차산 보루는 고구려에서 만들었고 475년(장수왕 63년)에 한강유역에 진출한 후

551년 신라와 백제에 의해 물러날 때까지 사용되었던 곳입니다.

아차산 보루에서는 백제의 도성이었던 풍납토성과 한강 건너 남쪽이 한눈에 보입니다.

당시 한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 관계에 있었던 고구려와 백제의 긴장된 관계를 볼 수 있다

 

아차산 4보루

아차산 4보루는 둘레가 249m이고 긴 타원형이다.
크게 성벽과 건물지로 구성되어 있다.
성벽은 치(雉)가 5개이고 남쪽의 이중으로 된 치는 출입시설로 추정되며
고구려 성의 전형적인 들여쌓기 방식이 잘 나타나 있다.
성벽 상부 전체에는 온돌과 배수로, 저수조 등이 배치된 건물지 7기가 남아 있다.
이곳에서 출토된 토기류는 제작기법이나 형태상의 특징으로 보아 6세기 전반경의 토기로 밝혀졌다.
철기류는 종류별로 보면 무기류, 공구류, 용기류, 마구류 등으로 구분된다.
이 중 일부는 경사면에 설치된 간이대장간 주변에서 집중적으로 발굴 되었다.
이 점으로 보아 당시 군대에는 대장장이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간단한 손질도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아차산 4보루는 500년 무렵에 축조되어 북상하는 백제군을 방어하는 방어기지였으며
당시 100여명의 병사가 주둔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아차산 고구려 병사의 하루

1500년 전 이곳 아차산 보루에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손꼽아 기다리던 병사들이 하루하루를 힘겹게 보내고 있었다.

아차산 보루의 병사들은 각자의 고향을 떠나 이곳으로 배치된 것으로 생각되는데,

기록에 따르면 당시 병사들은 3년 정도 변방에 배치되어 근무하였으며, 기한이 지나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병사도 상당수 있었다.
아차산 보루는 변방의 최전선을 지키는 곳이므로 이곳의 병사들은 전투가 주임무였다.
그러나 출토 유물을 통해 볼 때 훈련과 경계 등 병사로서의 기본적인 일과 외에도 많은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구의동 보루에서는 철제 보습과 각종 농기구가 출토되었는데 이는

병사들이 평소 전투가 없을 때에는 농사를 지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 아차산 보루 등에서 발굴된 대장간 시설로 보아 일부는 무기나 공구를 수리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춘 병사도 있었다.
취사도 물론 병사들의 몫이었는데 방앗간에서 쌀이나 조의 껍질을 벗겨 식사를 준비한 것으로 추정된다.

 

멀리 양평대교가 내려다 보입니다

오늘도 대교밑으로 흐는는 아리수는 수없이 많은 세월을 간직하며 유유히 흐르고 있습니다

 

'대성암 300m'라는 이정표를 따라 왼쪽으로 들어서면 넓게 펼쳐진 바위면 아래로
한강이 시원스럽게 보인다. 대성암으로 내려가는 길목에는 바위길과 돌길이 많아
오를 때와는 다른 분위기이다. 산줄기에 폭 파묻힌 마당 끝에 자리한 대성암은
분위기가 아담하고 호젓하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한강 풍경 또한 일품인데
암자측에서 편안히 앉아 구경할 수 있도록 의자를 조르르 내놓은 배려가 고맙다.

 

어떤분들은 아차산을 가볍게 생각하는데..

암석으로된 이런 산행길도 있어서 산행을 좋아하는 산악인들에게 기쁨을 전해주기도 합니다

 

대성암의 종각입니다.
대성암이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으나 근거를 찾기는 어렵다 합니다.
1921년 安寶光和尙이 관음기도후에 瑞夢을 꾸고 이 산을 찾아와 석굴을 발견했는데,
梵窟寺라는 암각문을 확인하고 폐허의 寺址를 인수하여 법당과 요사를 짓고
절 이름을 大聖庵이라 했다고 전합니다

 

누가 다 같다 놓았는지...제법 많네요

아마도 불자들이 각자의 소원을 담아  같다 놓았으리라고 생각이 듭니다

 

고구려의 역사를 소개하는 대장간 마을도 있더군요

 

아차산에 오르다보면 애견들을 데리고 함께 산행에  나오신 분들을 종종 봅니다

애견을 데리고 나올때에는 반드시 챙겨 가지고 다녀야 할것이 잇죠..모두 아시리라 믿습니다

 

큰바위얼굴

조금만 올라가면 큰바위얼굴이 보이는 전망대가 있다.
'태왕사신기'에서 광개토대왕 역할을 한 배용준이 촬영 중 발견했다.고 합니다
실제 이 바위가 있는 곳은 풍수리리학적으로 기(氣)가 매우 강한 지역으로

사람들이 찾아와 기원을 하는 곳으로 유명하답니다.

 

아차산 제 5보루에서 바라본 한강
6세기 중반에는 한강을 사이에 두고 고구려와 신라-백제 연합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을 듯.
여기서 한강과 그 일대를 바라보니, 아차산이 고구려 입장에서 얼마나 중요한 곳이었는지 알

 

야경이 정말 환상이지요

 

아차산 야간산행에 오른 마운틴 유나이티드 산악회원님

 

사색하기 좋은 이계절에...........

세상근심은 잠시 내려 놓고 자연을 벗삼아 걸어보는것도

삶의 도움이 되지 않으련지요

살다 보면 힘들 때도 있고, 억울할 때도 있다. 그래서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럴 때 제일 필요한 게 희망아닌가? 우선 나부터 다른 사람에게 희망의 스위치'를 눌러 주자

 

24,Oct,2013 아차산에서 전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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