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엔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시대를 살았지만 지금은 하루 하루가 달라진다.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를 정도로 급변하는 시대를 살고 있을 정도이다.
친구도 변하고 우정도 변한다. 심지어 敵들도 변한다. 주변 사람들은 세상이 많이 변했다 한다.
내가 봐도 많이 변했다. 물론 내 자신이 부침이 가장 심했고 변했을 것이다.
변화하는 시대에 안변하는게 이상할 정도의 세상이되었다.
자연도 변하고 세상도 변하고 사람도 변한다.
나는 이 변화를 배신이라고 하지 않고 '진화'라 부르고싶다.
‘새는 태어나기 위해 알 껍질을 깨뜨린다. 새에게 알은 하나의 세계다.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할 수밖에 없다.’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서양 고대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한 번 담은 강물은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말을 남겨, 세상 만물은 변한다는 주장을 펼친 바 있는데,
그의 비유와 걸맞게 우리가 사는 형이하학의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 변화를 받아 들이길 두려워 하지만 피할 방도는 없는 것 같다.
급변하는 세상이란 말을 자주 사용한다. 속도의 문제가 있긴 하지만 세상은 늘 변하고 있다.
이세상에는 하루도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나만큼은 변하지 않을 거 같아도 제일 먼저 변한다.
우리는 변해야 한다는 명제를 가슴 한편에 늘 지니고 산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이 말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다. 왜 변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가 학창시절 나눴던 우정이란 것도 세월이 흐르면서 많이 퇴색했다.
영원히 변치말자고 맹세해 보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있는가? 교정 한구석에서 영원한 우정을
감히 꺼내며 새끼 손가락을 걸어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있었는가?
' '소경 개천 나무라듯' 남 탓 할 필요가 없다.
누가 먼저 변했느냐는 옥석가림은 어리석은자들의 전유물이다. 내가 변한게다.
약한 미풍에도 흔들리는 물처럼 결국은 내 탓이다. 나는 내 인생이 서럽다고 느껴질 땐
시작(詩作)을 시도한다. 이 때의 시편들은 처량하고 맑은 여음(餘音)으로 하염없이 서럽다.
시적 사유는 명상적이고 고요한데 저릿저릿 온몸으로 퍼져가는 기운을 느낀다.
그 서정적인 여음속에 로뎀나무 숯불처럼 오래 꺼지지 않는 뜨거움이 있고
바람에 우는 대숲처럼 서늘한 기운도 있다.
-全政文 詩人의 ((흘러가는 시간앞에서)) 중에서-
photo back ground-해남 달마산
전남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산 303-2
사소한 것에서 운명이 가리울 때┃詩人이 보는 世上┃2024-12-06 (10) | 2024.12.06 |
---|---|
소신껏 살자┃詩人이 보는 世上┃2024-12-05 (41) | 2024.12.05 |
오라 하시는날┃詩人이 보는 世上┃2024-12-03 (5) | 2024.12.03 |
내 몫을 사명으로 인식할 때┃詩人이 보는 世上┃2024-12-02 (2) | 2024.12.02 |
沈黙의 시간┃詩人이 보는 世上┃2024-12-01 (3) | 2024.12.01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