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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흐르듯 살아야겠다┃詩人이 보는 世上┃2025-02-11

2025年 日常

by 詩人全政文 2025. 2. 11.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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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3:6절에 보면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라는 말씀이 나온다.

열매를 내지 못하고 땅만 차지하는 나무를 보는 농부의 심정은 편치 않았을테지만 한해만 더 기다려

보겠다는 것이 또한 농부의 심정이다. 우리교회  울안에도 커다란 나무가 여럿이다.

조만간 잘라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망설이고 있다. 그외에도 거의 쓸모없는 나무가 여럿이고

주변에서는 잘라 버리라고 조언하지만 제대로 전지를 하고 거름을 주어 키우면 내년엔 열매를

딸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정성을 들여 다듬었다. 아무리 흔하다 하더라도 몇년씩 키운 나무를

잘라내는 것이 국가적인 손해라는 생각이 들어 요긴하게 사용하려 일단 전지를 했는데

올해는 별로이지만 내년엔 혹시 열매를 맺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고 반드시 열매를 맺게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예수님은 전직 갈릴리 순회목수였지만 나무에 대하여도 일가견이

계셨던 것 같다. 비유중에 농부와 농사에 관한 말씀을 자주하셨다.

 

빌립의 권면으로 나다나엘이 주님을 찾아 왔을 떄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다"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1세기에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다”라는 말은 유대인들이 자주 쓰던 표현이었다.

토라는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마을의 회당에나 있는 것이었다. 당시 랍비 문헌을 보면, 회당이 없는

작은 마을에서 토라를 공부하기에 좋은 장소로 추천된 곳이 바로 무화과나무 아래였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그가 무화과나무 그늘아래 있었다.”는 말을 들으면 “아! 율법을 연구하고

말씀을 묵상 했구나!”라고 생각한다.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열심히 토라를 공부하고

진리를 찾던 구도자였다. 예수님은 뜨거운 여름 햇살을 피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토라를 묵상하던

나다나엘을 이미 알고 계셨던 것이다.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으면 주님이 알아 보신다.

누구나를 부르셨지만 아무나를 부르시진 않는다. 내가 말씀을 붙잡고 애쓸 떄 내 수고를 인정하신다.

나도 농부의 심정을 흉내내어 나무를 함부러 죽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묘목에서 이 정도의 나무로 자라기까지 상당 시간 공을 들였을텐 데, 쓸모없다고 버리는 건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부실한 허리지만 틈틈히 전지작업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쓸모없으면 너무 쉽게 버린다. 이용 가치가 사라지면 헌신짝처럼 버리는 게 세상 인심이다.

정말 세상에서 알다가도 모를게 인간의 마음이다. 그 걸 원망할 필요가 없다. 세상이란 그런 것이려니

하며 살다보면 달관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초연한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다.

몸이 피곤하고 아플 때에도 육신이란 다 그런 거라고 받아 들이기 까지가 어렵지 일단 받아들여지면

그런대로 고통중에도 의미를 발견할 수가 있다. 나도 한 땐 찬사도 받아 보았고 인기를 얻기도 했으며

융숭한 대접도 받아 보았다. 하지만 그 환상은 언젠가는 깨어지게 되어 있다. 몇번이고 되뇌이는

말이지만 '지금 행복하냐?'고 묻는 질문에 대하여 애써 고개를 끄덕이지만 사실은 내 생애에서

가장 불편한 시절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육신은 고달프지만 가식과 이중성을 더이상은 안보아도 되고,

앞면과 뒷면이 각각 다른 얼굴인 야누스(Janus)를 내 의지에 따라 피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런대로 만족한다. 그냥 자연스런 삶을 살길 원하고 물흐르듯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져 본다.

 

-全政文 詩人의 ((흘러가는 시간앞에서)) 중에서-

photo back ground-관악산

서울 관악구 신림동 산 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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