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늙음’이 ‘낡음’과 동의어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몸은 늙었으나 사고(思考)가 낡지 않아야 건강한 삶이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젊어서는 남과 경쟁하며 살았지만 이젠 내 자신과 경쟁하며 살아야 한다.
현저하게 나약해진 모습이 점점 익숙해지는 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여유(餘裕)를 잃지 않으려 한다.
‘속도’가 빨라지면 ‘각도’가 줄어들어 삶을 다르게 볼 수 있는 가능성도 줄어든다.
속도를 줄이고 밀도를 늘려야 평범한 일상에서도 행복감을 만끽할 수 있다.
평범한 일상에서 행복감을 느끼려면 곡선의 물음표를 던져 직선의 느낌표를 만나야 한다.
곡선의 ‘물음표’를 사랑해야 직선의 ‘느낌표’가 감동으로 다가온다.
사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여유(餘裕)있는 삶을 소망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내 자신이 더 알고 있다. 흔히 '한물갔다'는 소릴 많이 한다. 이는 채소나 과일,
어물 따위가 한창 거두어지거나 쏟아져 나오는 제철이 지나다는 뜻으로 사용되며
싱싱한 정도가 떨어진다는 의미로 사용되어 진다. 즉 전성기를 지났는 뜻이다.
내 전성기는 언제쯤이었을까?
학창시절 야구 방망이를 휘둘러 학교 유리창을 두어번 깨틀였을 떄였을까?
특전사 패기로 군생활을 했던 시절이었을까?
직장생활을 하던 시절이었을까?
아님 40대 초반에 법인대표로 목에 깊스를 하고 살았을 때였을까?
세계여행을 하면서 100여개국 이상을 활주하던 때였을까?
아무래도 혈기방장했을 떄라는 생각은 들지만 전성기는 아니었던 것 같다.
어영부영하다 보니 벌써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다 잠시 간이역에 내려 방황하고 있다.
아직은 '한물같다'는 소릴 들으면 기분이 좋을리 없건만 사실이 그런즉 어찌 할 수 있는가?
목적 없는 삶은 공허하지만, 목적만 남은 삶은 살벌하기만 하다.
험난한 경쟁의 바다를 지나 마침내 인생을 찬찬히 돌아볼 여유를 가지게 된 노년은
권위주의와 허세로 무장하는 대신 '내가 욕심내던 것들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는 것들을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이다. 더 이상은 조바심을 내지 않고 살기로 했다.
공자는 인간 60이면 이순(耳順)이라 했지만 나이 예순을 넘어서도 남의 말소리가
귀에 거슬려 마음 상할 때가 많다. 듣기가 거북하면 못들은 척, 흘려버리면 그만인 일에
얼굴을 붉히고 억울하단다. 때론 분노와 울분을 토하며 곱씹어 생각한다.
보고도 못 본 척 가볍게 넘길 일에 과민하고 가슴앓이 하던 일들… 노인이면 노인다워야 한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쉬운게 아니다. 고전 인문학자 전호근 경희대학교 교수는 책 <선배수업>에서
'삶이 노년에 가까워질수록 삶의 무게가 늘어나는 건, 가진 게 늘어서가 아니라 잃어 버린 게
많기 때문'이라고 했다. '잃어 버린 게 많아서 초라해진 자신과 화해'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세우며 '성숙'을 기하는 것이 중년 이후 중요한 삶의 과제'라는 것이다.
끝없는 노욕에 후배들에게 설 곳조차 제공하지 않는 '그들만의 굿판'만을 보다가 돌아서는
경우도 허다하다.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어려움은
자기스스로 만드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우리말에 제 스스로 무덤을 판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자기가 묻힐 무덤을 스스로 파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정말 자기 무덤을 파는 사람이 많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위해 무덤을 만들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이 무덤을 만들고 있다.
그게 자기가 묻힐 무덤이란 걸 모르고 열심히 파고 있는 것이다.
-全政文 詩人의 ((흘러가는 시간앞에서)) 중에서-
photo back ground-속리산 말티재 전망대
충북 보은군 장안면 장재리 산 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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