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서면 길이다. 전후좌우에 길이 있다.
아침에 길을 걸어 이곳에 왔고 저녁에 이 길을 걸어 되돌아가야 한다.
숨 쉬는 한 걸어야 하는 게 길이다.
인생 자체가 길을 걷는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길을 걷고 있고 이 순간도 그 길 위에 있다.
길이 없으면 걸을 수가 없다. 걸을 수 없다는 것은 나아감이 없다는 것이다.
진전과 변화를 수용하는 것도 길이다.
갈 수 없음은 이룰 수 없음이다.
관계의 단절이나 진로의 폐쇄는 길 없음에서, 혹은 길의 막힘에서 온다.
정지된 길에서 존재양식의 성숙을 기대하기 어렵다.
요즘엔 길이 너무 많다. 복잡다기해졌다.
땅만이 아니다. 하늘로, 바다로, 사방팔방으로 열려 있는 게 길인 세상이다.
그뿐 아니다. 없던 길이 새로 놓이고 있던 길은 넓혀진다.
도시만이 아니다. 시골도 한가지다.
수없이 늘어난 길들은 예전과는 다른 모습이다. 맨 흙길을 만나보기 어렵다.
모두 아스팔트를 깔고 위에다 아스콘을 덧씌웠다.
그 위로 육교가 얹힌다. 공간 활용의 극대화 방식이다.
에둘러 걷던 길이 어느 날 계단이 되어 있기도 한다.
우마차가 덜커덕거리던 농로도 말끔한 포장도로로 바뀌었다.
호처럼 휘어 반 바퀴 돌아서 가던 길은 곧게 펴놓았다.
굽이굽이 휘감아 도는 곡선의 완만한 정취를 길에서 맛보기는 영 글렀다.
옛날 굼뜬 버스가 뽀얗게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던, 멀리 아득한 신작로 굽잇길―
아리랑 고개의 낭만은 찾아볼 수 없다.
속도와 효율을 위한 길의 변신은 놀랍다. 격세지감을 불러일으킬 만하다.
동네 어귀에 들어서서 몇 걸음 들어가면 길섶에 민들레와 질경이가 납작 엎뎌 있고
괭이밥이 노란 꽃을 피우는 고샅길은 얼마나 소박했던지. 그 길 위를 오가며 눈길을 주고받던 사람들,
속내 터놓아 정 섞던 이웃들. 꾸부정한 골목의 돌담길 접어들면 누렁이 꼬리치며 나오고,
뉘 집 수탉 홰치며 우는 소리가 울담을 넘어 인정이 출렁였다. 비 오는 날 흙탕물 뒤집어쓰던 길,
바람 불어 모래먼지 풀풀 날리는 흙길이었지만 사람 냄새 물씬 나는 인정의 길이었다.
오늘의 길엔 사람이 없다. 차만 있고 사람이 없다.
자동차의 소음만 있고 두런두런 사람의 말소리가 없다.
과속과 질주만 있고 느긋한 질서와 여유의 표정이 없다.
효율만 생각했지 사람을 생각하는 배려의 마음이 없다. 유형의 길은 무형의 길로 통한다.
사람이 다니는 길은 인생행로와 표리를 이룬다. 구도의 외로운 길이 있고, 상상 속의 꿈길,
역류에도 몸을 던지는 연어의 모천회귀 같은 사랑과 희생의 길이 있다.
눈에 보이는 길만 길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길-삶의 길, 가치 창조의 길도 길이다.
유형의 길이 일차원의 길이라면 무형의 길은 보다 높은 다른 차원의 길이다.
단순한 평면의 길 위에 복잡한 입체의 길이 놓여 있다. 철학과 종교는
고차원의, 인생을 안내하는 길라잡이의 길이다. 길을 빛내려는 이들의 그 길은 아름답다.
길은 길에 연하여 잇닿아 있어 끝이 없다.
어느 길을 갈 것인가. 정도인가, 사도인가. 길의 선택은 걸어갈 사람의 임의다.
길에 대한 호·불호의 정서가 선택의 잣대가 될 것이다. 그 도달점은 사통팔달이다.
어차피 도달해야 하는 게 길이다.
길의 끝에 이르는 것을 성취라 한다. 성취는 환희를 불러 황홀하다.
길은 도시의 아스팔트길보다 문명 이전의 길,
흙냄새 풍기는 시골길이 좋다.
목월의 「청노루」에 나오는 ‘느릅나무 속잎 피어가는
열두 굽이’로 굽이굽이 사려 있는 길,
새의 지저귐이 귀를 맑게 하는 오솔길―
솔바람 속에 패랭이꽃과 달맞이꽃이
밤과 낮을 다투어 피는 길이면 더욱 좋겠다.
그 길엔 벌들이 날아와 윙윙대고, 쇠똥냄새 풍기고,
농부의 땀내음도 향긋할 것이다. 그 길 위에 서고 싶다.
사람이 닿는 길, 사람이 겪는 길.
전라북도 군산시 옥도면 선유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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