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傲慢)┃詩人이 보는 世上┃2025-04-21
가난한 나라 대한민국에서 태어났으면서도 가난을 모르고 살았다면 얼마나 다행인가?
요즘 종편방송을 보노라면 아프리카나 동남아의 가난한 나라 어린이들이 먹을거리가 모자라 죽어간다는
뉴스를 볼 때마다 안타까움을 느끼곤 한다. 그래서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한다고 했구나 싶다.
초등학교 때 꽁보리 밥은 커녕 아예 도시락을 가져오지 못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런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이 식사를 할 때 슬며시 교실을 빠져나가 샘물을 한 바가지 마시고 운동장이나
나무그늘 아래서 놀곤 했었다. 그런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가난이 무엇인지 절실하게 겪었을 것이다.
어른이 되어서 가난했던 그 친구들을 만나 보면 그 아이들이 대도시로 나가 고생 끝에 돈을 벌어서
부자가 된 이들이 많다.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아야겠다는 각오로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때는 월사금(月謝金)을 제때에 내지 못하면 시험을 보지 못하게 하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게 가난 때문인 줄 몰랐다. 끼니때 제대로 밥을 먹지 못하는 것만이 가난인 줄 알았다.
그 때는 누구나 가난하던 시절이었다. 하루 세끼 끼니를 때운다는 게 참 힘들었다.
상추에 된장만 싸서 빈 배를 채우는 이들도 있었다. 그때 하루 한두 끼는 죽으로 때웠다.
김치죽, 아욱죽, 송피죽(松皮粥), 콩나물죽, 시래기죽이나 수제비와 칼국수 등을 즐겨 먹었다.
가난했기에 더욱 억척스럽게 인동초마냥 살아남으려 안간힘을 쏟았다.
경제 규모가 전반적으로 커져가고 있음에도 빈곤층은 줄기는커녕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생산과 소득 총량이 증가했으나 분배 기능 고장으로 계층 격차는 놀라울 만큼 벌어졌다.
경제 성장률이 높아지면 그 과실이 빈곤층에도 돌아간다는 이른바 '낙수효과'는 별무소용의 허구로
드러난 지 오래다. 미국은 세계 최강국으로 부상한 지 오래이나 사회적 빈곤현상만 놓고 보면
선진국이라 부르기 민망할 정도이다. 작금의 대한민국을 들여다 보면 정치, 경제, 사회 현상이
미국의 그것을 반면교사처럼 상당 부분 빼닮은 한국의 실상이 겹쳐 떠오른다.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론이 빈번히 나오는 작금이어서 더 그런 듯하다.
미국에서 가난의 문제는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 수백만의 미국인들이 양질의 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고, 좋은 일자리를 구해 적절한 주거 환경에서 온전한 생활을 할 기회 또한
얻지 못하고 있다. 지금의 빈곤층은 과거 수십 년 동안의 빈곤층보다 더 심한 가난에 시달린다.
이른바 빈익빈 부익부 현상. 빈곤 격차가 그만큼 커졌을 뿐 아니라 가난에 한번 붙잡히면
빠져나오기 힘든 구조여서다. 가난이 개인의 도덕적 해이, 나쁜 습관, 무능력에 기인한다는
순진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며 가난 문제를 사회 구조적 관점에서 봐야 그 원인과 해법이 제대로
나온다고 역설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인지 능력이 부족하다는 '유전 이론'과 가난한 사람들은
성취동기가 떨어진다는 '문화 이론', 가난한 사람들은 교육과 기술 수준이 뒤진다는 '인적자본론'은
허구라는 것이다. 오래된 친구중에 소위 말하는 自手成家한 인물이 있었다.
지금은 산세좋은 어느 곳에 가서 요양한단 소릴 들었지만 연락이 두절되었고 斷交까지는 아니지만
거의 絶交한 상태인데, 분주하게 살면서 판이한 모습에 실망감을 느껴 본의아니게 거리를 두다보니
자연스레 멀어져 버렸다. 그 놈의 정치가 말썽이었고, 정치에 뛰어들면서 순수함을 잃어가는 모습을
본인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歷歷하게 보였다. 골프정치와 리모콘정치에 길들여지면서 노골적으로
편가르기를 하는 我田引水의 행동을 보였다. 조강지처(糟糠之妻)란 말이 있다. 지게미와 쌀겨로
끼니를 이을 때의 아내라는 뜻으로, 몹시 가난하고 천할 때에 고생을 함께 겪어 온 아내를 이르는 말이다.
‘조강지처 불하당’이란 말이 있듯이 조강지처를 홀대하면 반드시 그 업보를 받게 되는 법이니
어떤 일이 있더라도 초심을 잃으면 안된다. 오만(傲慢)이 타락의 시작이다.
존 밀턴의 실낙원에서 보면 대천사 루시퍼가 자기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오만한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에게 도전했다가 그의 무리와 함께 지옥에 떨어져 사탄이 된다. 사탄은 오만에 사로잡힌 대천사에
다름 아니다. 중세교회에서 일곱 가지 대죄를 열거할 때 맨 먼저 언급한 것이 오만이다.
이 것은 오만이 모든 죄 가운데서 가장 큰 죄라는 것을 말해준다. 순수한 소명의식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던 목사도 오만에 사로잡히면 루시퍼처럼 사탄으로 변하게 된다.
오만해진 목사는 복음을 전하는 예수님의 종이 아니라 교인들 위에 군림하는, 예수님의 양들을
자기 양으로 착각하는 목자가 된다. 그렇게 되면 사람뿐 아니라 하나님까지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때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봉사하거나 희생하거나 목회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일한다. 자기 말에 무조건 순종하는 사람들만을 데리고 자기 말이면 모두 아멘하는 교회를,
자기 왕국을 만든다. 초심을 잃지 않고 마지막까지 달리는 일은 쉽지 않다.
육체적인 욕망을 온전히 버릴 수 없는 우리 인간은 본능적인 욕망에 끌려서 명예나 물질을 탐하고
권위에 사로잡히게 된다. 바울은 원하는 것은 행하지 못하고 원치 않는 것만을 행하는 것이
인간이라고 말했다. 목사들의 경우에 교회가 어느 정도 성장하면 자칫 오만해지기 쉽다.
은혜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이룬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오만의 유혹을 받을 때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한 바울처럼 자기의 육체적 욕망을 쳐서 물리치는 지속적인 싸움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 오만으로 인해서 하나님까지 외면하는 타락자가 되고 만다.
오만해진 천사가 타락해서 사탄이 된 것처럼, 하나님을 외면하는 타락한 목사는
사탄의 무리에 속한다. 작은교회라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교회를 성장시키고 오만하지 않은 사람을 거의 본적이 없기에.......
-全政文 詩人의 ((흘러가는 시간앞에서)) 중에서-
photo back ground-익산 왕궁오층석탑 벚꽃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왕궁면 궁성로 6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