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신과 믿음┃詩人이 보는 世上┃2025-04-05
나무와 사람은 넘어져봐야 그 크기를 알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좋은 친구를 가졌다는 것은 깨달음의 반을 이룬 것이 아니라 전부다”는
말이 새삼스럽다.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나무의 크기를 알아 본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그러나 넘어지면 비로서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사람도 곤경에 처해봐야 진정한 우정을 확인할 수 있다.
사람의 그릇 크기는 이해관계에 있을 때의 처신으로 판단하기는 어렵다.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고 판단되고, 거래가 끝났다고 생각할 때,
그래서 더 이상 볼 일이 없다고 생각될 때 처신하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의 그릇 크기를 알 수 있다.
"말이 힘이 있는지를 알려면 먼 길을 가봐야 알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면
시간이 오래 지나봐야 한다." 명심보감 계선편에 나오는 이말은 백 번 들어도 지당하다.
나와 이해관계가 있을 때 친절하기는 쉽다. 하지만 이해관계가 끝났을 때도 친절한 태도를
유지하기는 어렵다. 내 지인중에 꽃나무를 병적으로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알레지가 극성일 때는 외출도 안할 정도이며, 꽃이 필 때와 질 때가 너무 상반되어 싫다고 한다.
하지만 지저분하게 진다고 기피할 건 아니다. 어차피 인생도 그렇게 낙화하는게 아닌가?
영원한 이름다움이 존재하질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자꾸만 단순하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나처럼 생각이 많은 사람에게 단순이란 말은 가당치 않은 이야기겠지만
그럼에도 단순하게 사는 것이 나를 지키는 일이라 믿어 노력중이다.
때론 가지고 있던 것을 버려야 단순해지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한 때는 책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 당장 읽지 않은 책이라도 다음에 보겠다면서 쌓아 놓다 보니
집에 가장 큰 짐은 책이다. 이사할 때 조금씩 정리했는데도 아직도 적지 않다.
돈이나 권력, 명예는 물론이고 책이든 음반이든, 가구든, 그 무엇이든 과도한 집착은
바람직스럽지 않다. 보지 않은 것, 그리고 현실적으로 볼 수도 없는 책을 끼고 있을 이유는 없다.
쓰지도 못할 만큼 돈을 가지는 것도 마찬가지이리라. 그럼에도, 어떤 것에 집착하다 보면
점점 그것에 대한 욕망이 자라난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으로, 존재 이유로 착각하기 쉽다.
사람은 움켜쥐고 사는 것에 관심이 많고 익숙하다. 삶에서 움켜잡지 못하게 되면
상대방에게 뒤쳐진다는 심리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움켜잡지 못하면
큰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한다. 사람을 조급증 환자로 만들고,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결정할 때 무리수를 잉태하기도 한다.
너도 나도 움켜잡는 일상으로 바쁘다. 바람을 마주보고 맞으면 역풍(逆風)이지만
뒤로 돌아서서 맞으면 순풍(順風)이 된다. 움켜잡고 있는 것을 내려놓는 순간
또 다른 것을 잡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내가 평생을 꿈꿔왔다고 믿었던 오늘,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들, 누구보다 잘 안다고 믿었던 사람들….살다보면 그 모든 것들의
‘진짜 모습’에 대한 고민이 불쑥 가슴을 파고드는 때가 있다. 가시 돋친 한마디에
마음을 베이는 날이면 마음은 한없이 작아지고 외로움까지 쏟아진다.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은 있다. 그럴 때마다 '지켜보는 가마솥은 더 늦게 끓는다'는
격언을 떠올린다. 아직은 실망하기에 이르다는 생각을 품는다.
이전이나 지금이나 가장 애창하는 곡이 있다면 '주는 저산밑에 백합'이란 곳이다.
"내 진정 사모하는 친구가 되시는 구주 예수님은 아름다워라.
내 맘이 아플 적에 큰 위로되시며 나 외로울 때 좋은 친구라.
내 몸의 모든 염려 이 세상 고락간 나와 항상 같이 하여 주시고 시험을 당할 때에
악마의 계교를 즉시 물리치사 날 지키시네. 온 세상 날 버려도 주 예수 안버려
끝까지 나를 돌아 보시니 주는 높은 산성 내 방패시라." 항상 입에 달고 사는 찬송인데,
그 중 2절 세번째 소절에 있는 '온세상 날버려도 주 예수 안버려'하는 소절인데
나이가 먹을수록 더 애틋하게 부르게 된다. 요즘도 흥얼 흥얼 거리며 하루에도 여러번
되뇌이면서 부르고 또 부르고 한다. 그럴 때 마다 어김 없이 내 눈에는 눈물이 맺힌다.
힘들때 고비 고비 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 까지, 주 예수께서 함께 하심을 나타내
주심으로 늘 위로하심 속에 지금까지 수많은 태산을 넘어왔고,
또한 앞으로 넘어야 할 태산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많큼 많이 있다고 생각할 때
이 찬송은 멈추지 않을 것같다. 지금까지 넘어 온 것도 크고 힘이들어 숨막히듯
힘들고 지치고 어려웠는데 앞으로도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넘어 설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아마도 최치원이가 이 시대를 살았다면 '이 세상 뉘라서 내마음 알아주리'라는 절규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온 세상 날 버려도 주예수께서 안버리신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지금 내가 혼자라는게 두려운게 아니라
주님이 날 버리시지 않을 거라는 확신과 믿음이 중요하다
-全政文 詩人의 ((흘러가는 시간앞에서)) 중에서-
photo back ground-송광사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소양면 송광수만로 25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