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年 日常

소크라테스┃詩人이 보는 世上┃2025-02-12

詩人全政文 2025. 2. 12. 00:44

 

 

새로운 신(神)을 섬기고, 청년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소크라테스가 기소되어 사형 선고받은 게

BC 399년쯤이다. 당시 아테네는 스파르타와 전쟁에서 패한 뒤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사회적으로 침울한 분위기를 반전시킬 희생양이 필요했고, 소크라테스는 좋은 제물이었다.

`너 자신을 알라’며 평소 권력자·작가·시인 등 아테네의 실력자나 지식인들을 깨부수고 다녔던

소크라테스에게 박힌 미운털의 역습이었다. 하지만 따져보면 소크라테스는 대책 없는 인물이기도 했다.

가장이었지만 평생 돈을 벌어본 적 없이, 허구한 날 시장에서 젊은이들과 공론했다.

가장이 내팽개친 가정사를 책임진 건 아내 크산티페였다. `악처’의 대명사로 남은 그 이름이다.

`세기의 재판이야기’ 저자는 크산티페의 명예 회복을 주장한다. “지아비 섬기고 대문 밖은

얼씬도 하지 않은 정숙한 부인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살기 위해 몸부림 친 이 여인에게

누가 돌을 던지랴”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그렇게 죽었다. `오 크리톤!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진 게 있네. 기억해뒀다가 꼭 갚아주게.’ 마지막 유언이 이랬다. `

철학자의 가장 완벽한 죽음’(`세기의 재판이야기’)이라는 평가 이면 `무책임한 가장의 허세’로도 이해됨.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선택했고, 독이 든 잔을 건네 받았다. 그는 슬픔에 빠진 동료들과 제자들을 향하여

자신의 영혼의 불멸에 대하여 차분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는 죽음은 곧 육체로부터 영혼이 해방되는

것이라고 보았고, 진정한 철학자는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크리톤 등은

소크라테스에게 도주를 권유했지만 소크라테스는 이를 거부했다. “철학하는 자유를 포기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내 이성의 명령이네.” BC 399년 5월에 소크라테스는 한 달 동안 제자들과 담소하다가

독차를 마시고 죽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건강의 신 아스클레피오스(Asclepios)에게

평온한 죽음을 보장해주는 독약을 내려준 것에 감사하였고, 곧 독약을 마시고는 숨을 거두었다.

나는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병패는 철학이 없다는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정치나 언론에서

철학을 발견한다는 건 해변에서 바늘 찾는 것보다 더 어려울 정도이다. 요즘 언론의 양태에 대하여

실망감을 넘어 허탈감에 빠져 거의 뉴스나 만평을 시청하지 않는다. 전엔 연속극을 기피했지만

요즘은 뉴스까지도 귀를 막아 버렸다. 기대와 달리 대개의 보도는 주변적인 호기심, 또는 알아도 몰라도

그저 그런 주변적 담론만 되풀이하고 있다. 생각이 다른 사람을 붙들고 이야기하는 것만큼

곤혹(困惑)스러운게 없다. 요즘 내 주변에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대화가 불가능한 사람들.

담론(談論)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주제가 있는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은 더더욱 아니며 영양가없는

말을 주고 받는게 전부인데 왜 내가 이런 저런 말을 다 들어주며 시달려야 하는지 한심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사람은 절대 바람의 방향을 바꿀 수 없다. 인간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돛단배의 돛을 조정해 원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결정적 순간의 대화 역시 마찬가지다.

상대를 바꾸려는 시도보다는 원하는 방향을 중심으로 목적에 집중하기 위해 자신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것이 현명하다. 나는 지금 모든 사람을 품을 수 있는 아량이 없고, 소화해 낼 여유가

없기에 가능하면 마음 다치지 않으려고 의도적으로 말수를 줄이고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은 되도록

피하고 보는 습관이 생겼다. 영양가 없는 대화보다 혼자 노는 습관을 들이려 노력중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더 깊은 산속을 찾는 이유가 여기에서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내 성격상 누구나에게 살갑게 대하는 체질이

못되기에 사람을 피하여 은둔의 장소를 찾으려 했는데 어딜 가나 새로운 인연을 맺게되고

불편한 인간관계가 형성되니 여간 피곤한게 아니다. 젊어서는 헤프게 인연을 맺고 친분을 넓혀 갔지만

이젠 조금 진지하게 살고 싶고 단순하게 살고 싶다. 옛말에 "가마가 많으면 모든 것이 헤프다"는 말이 있다.

일이나 살림을 여기저기 벌여 놓으면 결국 낭비가 많아짐을 이르는 말인데, 그럴 능력도 없지만

한가지 일에 집중하고 꼭 필요한 만남외엔 가능하면 사람들을 선별적으로 관계를 맺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요즘 '혼사족'이 늘어나는 추세이다. 혼밥족은 알겠지만 혼사족이 무엇인지를 알아 보았더니 혼자 죽는

고독사를 일컫는단다. 사람은 어차피 혼자 죽는다. 문제는 그 임종을 누구도 지켜주지 않고 죽음을 알지도

못하는 고독사가 늘어나고 있다는 데, 주의 사자의 손에 이끌려 천당가는 사람이 혼사족인들 무슨 상관이

있을까만은 고독때문에 아무나 하고 교제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만약 둘만 내 곁에 있었더라면 오히려

일을 기피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혼자이기에 집중할 수 있었고, 나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노년을 헛되이 보내지 말고 아름답게 디자인해야겠다는 열정이 내 안에 존재한다. 노인이 되어갈 때

아름다워야 한다. 뒤에 나선 젊은이들의 발걸음이 빠르면 어서 좁은 길을 비켜서서 앞서가는 그들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연륜이 묻어난 당부를 하는 것이 도리이다. 늙으면 애가 된다는 말도 있다.

결코 좋은 뜻은 아님에는 분명하다. 순수해진다는 좋은 의미로 자연스럽게 받아 들이기 위해서는

순수를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나는 한 때 생각이 많아 몹시 곤고하게 산 적이 있었다.

길거리에 앉아 왜 나만 거머리같은 상념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이렇게 청승을 떠는지 내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마도 상당한 시간이 흘러야 분노도 용서도 사그러질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갑짜기 피곤이 몰려 오고 정신이 혼미해지고 현기증이 일어날 정도로 힘든 나날이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고지가 바로 눈앞이기에 견디는 방법외엔 달리 방도가 없었다. 운동을 하여 근육량이

늘어 났을 것이고 혈당을 떨어트린 날이었다고 자평하며 즐거운 마음을 가지려 노력한다. 그렇다고

무조건 노동에 매달린다는 말은 아니다. 그 짧은 시간에 내 존재의 의미를 찾고 균형을 유지하려 노력한다.

난 농사 일은 커녕 평생 낫 한번 잡아 본 일이 없다. 인터넷으로 공부하면서 조경을 하고 식물을 심는다.

아마도 얼마 간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점점 자리잡아 갈 것이다. 해도 해도 끝이없는 일에 녹초가 될

지경이지만 나를 찾아주는 분들이 있어 외롭지 않다. 왕초보에게 배울게 뭐가 있다고 나를 찾아 준

분들에게 한편으론 미안하고 고마웠다.

 

-全政文 詩人의 ((흘러가는 시간앞에서)) 중에서-

photo back ground-왕궁석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