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詩人이 보는 世上┃2024-05-20
조팝꽃이 하얗게 피어나던 그 푸릇한 오월에도,
가느다란 줄기에 꽃이 무거워 사정없이 고개를 숙이는 수국의 계절에도,
무성했던 나뭇잎을 털어내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가을에도,
그리고 죽음을 망불케하는 혹한의 계절에도 추억은 여전히 가슴 한켠에 희미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느닷없이 비가 오는 날이면 내 가슴은 서걱인다.
나는 기승전결을 명확하게 정리하는 것보다 때로는 여백으로,
때로는 실루엣(silhouette)으로 남겨 놓는 일이 많다.
아무리 인격적으로 저질스러운 몹쓸 인사라 하더라도
세월이 흐르면 그리움이나 후회로 남을 수 있기에 칼로 무우 자르듯 하지 않는다.
그간 내 주변을 스치고 지나간 수많은 군상들이 떠오르고 고독한 수도승이 되어 버린다.
나는 유독 비에 약하다. 하늘을 보며 비를 손으로 받아보기도 하고,
혀를 내밀어 비의 맛을 보기도 하고 나름대로 비를 즐기며 걷는다.
빗속에서 발로 느끼던 흙의 감촉, 손바닥 위로 떨어지는 빗물의 알싸한 기운,
흐르던 빗물을 발로 가르며 걷던 그것들까지 그리워진다.
세월이 한참 지난 지금도 비가 내리면 센티해 진다. 내 기분,
내 정서에 맞으면 그것이 선이라고 믿었던 어리석음을 참회하게 된다.
사람의 입맛은 연애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쳐다보기도 싫거나 혐오했던 음식도
어느 순간 먹을 만해진다. 심지어 마니아가 되기도 한다. 내겐 호박죽이 그랬다.
엄마의 꾸중에 못 이겨 마지못해 물컹하고 진한 호박 냄새가 났던 죽을 맛을 봐야 했다.
억지로 먹다 보니 언제부턴가 그 맛이 참 좋게 느껴졌다. 나도 호박죽을 ‘배운’ 것이다.
호박죽이 맛있는게 아니라 어머니가 그리운 것일게다. 추억을 끄집어 내어 보기 위해서이다.
나이를 먹다 보니 그 전엔 싫어 하던 걸 좋아하게 되고, 좋아하던 것에 대한 애착을
나도 모르게 버리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관계도 많이 바뀌었다.
죽고 못살았던 친구를 멀리한 경우도 있었고 나이먹으면 여유작작하며 살겠다는 생각을
버리게 되었으며 허튼 시간을 보내던 내 삶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익숙했던 일들을 청산하는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살다보면 이별이 참 많다.
이별이라는건 아무리 익숙해지려고 해도 익숙해지기 어렵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내가 속해있는 조직과의 이별, 가족과의 이별, 내가 아끼는 물건과의 이별 등등.
신기한건 지나고 나서 생각하면 그 때 그렇게 망설일 필요가 없었는데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별엔 좀 더 쿨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쿨한 척 행동을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내 감정에 쿨할 필요는 있다. 내가 즐겁고 의욕이 생기고 순간순간 기쁨을 느낀다면
이별은 필요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과감하게 이별을 하려고 마음 먹었다.
그렇다고 세상 재미에 빠져 들거나 돈벌레가 되려는 건 아니다.
안해도 되는 건 안하려 작정했고 내 목표를 이루는 순간까진 한눈팔지 않겠다는 결심이
흐트러질까봐 일부러 내 자신을 채근하고 있을뿐이다.
물론 100% 만족하고 100% 싫은게 어디 있겠나.
수치로 표현할 수 없는, 내 순간의 느낌에 충실한다는 말이다.
만약 어떤 이별로 인해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나는 어떨지 등등을 생각하는건
앞으로 일어나지도 않을(그리고 꼭 내 생각대로 되지도 않을 것이 분명한) 것에 대한
쓸데없는 걱정이다. 내 감정에 충실하게, 매 순간 충실하되 나에게 만족감을 주지 않는다면
과감하게 이별할 수 있는 것, 이런게 쿨한 이별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살다 보면 또 다른 길이 내 앞에 펼쳐지겠지. 그게 사람이든, 일이든, 그 어떤 무엇이든.
물론 어렵다. 하지만 한편으로 쿨한 이별이 어려운 이유는 그 전에 매 순간을
충실하게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살기로 했다.
-全政文 詩人의 ((흘러가는 시간앞에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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