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자의 삶┃詩人이 보는 世上┃2025-07-11
어린 시절부터 유독 물을 좋아했기에 여름 한 철은 거의 냇가에서 보냈다.
지금까지도 개 수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어릴 때부터 줄곧 이 자세로 수영을 해왔고,
오히려 개 수영이 더 익숙해져 있기 때문인 데, 아직도 지나는 길에 그 냇가를 찾아
추억에 잠길 때가 종종있다. 거기에서 '물수제비' 놀이를 하던 동무들을 회상하고 그리워 한다.
물수제비는 호수나 냇가같이 물결이 잔잔한 곳에 돌을 던져서 튀기는 것이다.
이 놀이의 관건은 돌이 가라앉기 전에 얼마나 많이 튀기냐는 것이다.
여름하면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를 연상하는 세대를 살아왔다.
짧은 시간 동안 갑자기 세차게 쏟아졌다가 그치는 비처럼, 어느 가을날 한줄기 소나기처럼
너무나 짧게 끝나버린 소년과 소녀의 안타깝고도 순수한 사랑이야기를 그린 『소나기』는
황순원의 대표적인 단편소설이다. 요즘 아이들 정서로는 잘 이해가 안되지만 우리 세대라면
여름하면 소나기가 연상되고 작은 개울이나 호수를 보면 병색이 짙은 소녀가 쉽게 연상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자연속에서 뛰노느라 공부하고는 담쌓고 살았던 유년시절을 보냈다.
공부를 못한게 아니라 할 시간이 없었다. 문만 열고 나가면 놀거리가 많은 데,
의리상 나만 공부한다고 할 수가 없기에 잠자리 개구리 미꾸라지 피래미 메뚜기 사냥에 열을 올렸다.
그래서 국어 산수는 약해도 자연만큼은 탁월했다. 요즘은 계절탓인지 금방 피로를 느낀다.
아이들은 그렇게 땀흘리며 뛰어 놀다가도 한숨 자고나면 금방 원기를 회복하는데,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회복의 속도가 둔화되었다는 말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젊을 때는 어떤 조직이나 세포에 만성 스트레스가 가해지면 그 세포의 분열이 증가해
손상을 치유하게 되지만, 더 이상 세포분열할 여력이 없어지면 그 부위의 기능이 감퇴되어,
결국 자연계의 모든 생명체가 노화를 거쳐 사멸에 이르게 된다. 도대체 사람은 왜 늙을까?
나무는 수천 년씩 사는데, 인간 수명은 기껏해야 100세 전후를 살다 세상을 떠난다.
성경 속 므두셀라 등 노아 대홍수 이전 인물은 800~900세까지 살았다는데,
지금의 인간 수명은 다른 동물에 비교하면 긴 편이지만 그래도 백년을 사는 사람이 드물다.
범위를 넓혀 보면 노화와 사멸의 과정을 걷는 것은 생명체뿐이 아니다.
자동차도 오래 사용하면 곳곳에 흠집이 나고 엔진 등의 성능이 떨어져 폐차의 운명을 맞게되며,
책상도 오래되면 까이고 삐걱거리다 어느 순간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이 노화의 '마모이론(Wear and TearTheory)'이다.
오래 사용하는 과정에서 물건이 마모되어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듯이 우리 몸도 살아가면서 받는
각종 손상에 의해 마모되어 더 이상 쓸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얼마전 뉴스에서 보도한 것을 보면,
향후 몇십년 안에 대한민국 인구의 50%가 노인들로 채워지는 초고령 사회가 된다고 한다.
동남아 특히 캄보디아나 베트남에 가보면 인구의 절반이 20살 미만인 데, 대한민국은 60세 이상이
절반이라니 이대로 가다가는 미래가 암울하다는 게 틀린 이야기가 아니다. 도대체 출산을 기피하니
점점 고령 인구가 많아지고 사회적 부담은 커질 수 밖에 없다.
기원전 42년, 62세의 키케로는 수필 ‘노년에 관하여’에서 노인이 왜 불행하게 보이는가에 대한
네 가지 이유를 거론한다. 일을 할 수 없다는 것, 몸이 약해진다는 것, 거의 모든 쾌락을 빼앗긴다는 것,
죽음으로부터 멀지 않다는 것. 그는 이 항목들을 하나씩 격파하면서 노년에도 삶을 즐길 수 있다고
피력한다. 카터 대통령은 재임 시에 가장 무능한 대통령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퇴임 후에는 가장 눈부시게 활동하고 있는 전직 대통령으로 존경을 받는다.
물은 많은 데 마실 물이 없으며 숲은 많은 데 쓸만한 나무가 없으며 유명한 사람은 많은 데
존귀한 사람이 사라진 시대에 비록 재선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은퇴 후에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며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는 분이시다. 요즘은 평균수명의 연장으로 100세 시대에 도래했다.
2014년부터 2030년까지 해마다 20만 명 이상의 베이비 부머 세대 은퇴자들이 쏟아진다는
예측이다. 이제 은퇴 이후의 삶은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해야 할 큰 화두가 되었다.
은퇴 이후의 삶이 길어지다 보니 경제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창조적인 새로운 삶을 살지 않으면
그 긴 세월을 조용히 늙어가는 것만으로는 채울 수 없게 되었다. 텃밭에서 고구마, 고추, 가지, 토마토,
오이, 호박을 비롯하여 재배 가능한 야채를 가꾸고 수확하는 기쁨은 어미가 자식을 기르는 것만큼
깨끗하고 귀한 즐거움을 주었을 것이다. 밭에 돌이 많아 쇠스랑으로 파고 돌을 줍는 고된 노동에
허리가 휘어지도록 고생하시던 모습이 기억속에 남아 있다. 도시생활 할 때의 소비 습관이 아직 남아
있지만 잘 입고 잘 먹는 일에서 자유로우면 시골생활은 도시보다 적은 돈으로도 생활이 가능하다.
유사시에 대비한 약간의 여유자금을 비축해 놓고 절약하며 살면 돈을 벌지 않고도
이 생활이 가능할 것 같다. 소유를 줄이고 존재가 승리하는 삶을 위해서는 돈을 쓰지 못하는 어려움을
참고 절제가 주는 단출함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은퇴하고 할 일없이 도시에서 빈둥대는 것보다
귀촌하여 추억을 여행하는 것도 즐거움이다. 은퇴해서 시간이 자유롭다는 점,
새로이 시골생활을 배우는 점, 은퇴자라서 서로 돈을 아껴 쓴다는 점,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어서 만나면 유쾌하고 재미있다. 도시생활이 군중속의 삶, 객체적인 삶이라면
시골생활은 자연과 내가 일체된 주체적인 삶이다. 그래서 나름대로 행복한 은퇴자의 삶을
준비하며 즐기려고 노력하고 있다. 지금의 나에게 강요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슬로우 시티를 만끽하고 있다. 옆 교회와 경쟁하지 않아도 되고,
년말이 되어 사무총회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만 놓치지 않으면 된다.
사는 일은 늘 이렇게 선택의 갈림길에서 서성대는 여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침에 일어나면서 부터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우리는 정말 많은 선택의 순간을 맞이한다.
일상의 평범한 선택이 모여서 개인의 삶이 되고 역사가 된다는 생각을 하면
아무리 사소한 선택도 쉽게 할 수가 없다.
-全政文 詩人의 ((흘러가는 시간앞에서)) 중에서
-photo back ground-